서로에게 미끌어져 들어가 비틀어지고 깨지다가,
깨진 조각들을 주워 이어붙이는.
▶Joep Beving의 「Every Ending Is A New Beginning」
대림역에 가기 위해 탔던 2호선 열차가 알고 보니 신도림행이라, 문래역에서 내려 다음에 오는 순환행 열차를 기다릴 때가 있었다. 아, 나는 신도림역에서 한 정거장만 더 가면 되는데, 하는 아쉬운 마음으로 열차를 기다렸다. 이어폰을 꼽고 핸드폰에 담긴 음악에 집중하다 보니, 금세 다시 열차를 탄 것 같았다. 내가 탄 열차가 신도림역에 도착하자마자 이전에 신도림행 열차에서 강제 하차했던 사람들까지 타야해서 엄청난 수의 인원이 열차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신도림역에서 열린 문과 반대편 문 가까이에 있던 나까지도 몰려드는 인파에 숨이 막혀왔다. 그래, 한 정거장만 더 가자. 조금만 참으면 곧 대림역이었다. 그때 갑자기 비명이 들어왔고 엄청난 힘으로 사람들이 안 그래도 좁았던 공간을 접으며 내 쪽으로 더 밀려왔다. 나는 순간적으로 유리 문과 사람 사이에 끼여서 통증을 느꼈다. 괜찮으세요,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뒤 이어, 만지지 마세요!라고 외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체 무슨 상황인지 나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 사이에 열차는 대림역에 도착했고 나는 서둘러 열차에서 내렸다. 평소보다 많은 인원이 대림역에 내렸다. 열차에서 내려 그제서야 내가 있었던 열차 호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중년의 남자가 피로 물든 얼굴을 하고서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로 멍하니 있었다. 남자의 두 손에도 피범벅이었다. 피를 토한 것이다. 열린 문틈으로 어떤 남성이 결핵일지도 모르니 그 아저씨를 만지지 않는 게 좋겠다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대로 열차를 타고 보라매 병원으로 가는 게 좋겠다는 소리도 들렸고, 이어 열차의 문은 다시 닫혔다. 자신의 피를 뒤집어쓰고 놀라 석고상처럼 굳어버린 아저씨의 모습이 열차의 속도만큼 빠르게 사라져가는데, 나는 그 아저씨를 제외한 풍경이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열차가 사라지고 슬픔이 몰려왔다. 그 아저씨가 혼자 외로울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자신으로 인해 누군가 놀라 비명을 지르게 했다는 것과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가슴과 목구멍이 타 들어가는 선명한 고통을 확인해야 하는 것, 그리고 나를 둘러싼 사람들은 그 아픔을 모르고 오로지 자신만 홀로 감당해야 하는 그 순간이 서늘하게 외롭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알고 있다. 이건 나의 주관적 현실에 해당한다는 것을.
과거에 몸이 뒤틀려가며 괴로워하면서 사실은 통증보다도 외로움이 견딜 수 없었던 나의 모습을 그에게 투사했으리라. 그 아저씨가 그 경험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나는 끝내 알 수 없겠지만, 난 아직도 그 사람을 외롭다고 기억하고 있다.
사람은 객관적 세계, 발생한 사건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틀에 맞게 주관적으로 구성해서 인식한다.
Albert Ellis의 REBT(합리적 정서 행동 치료)의 핵심은, 발생한 사건에 대해 자동적으로 반응하는 나의 비합리적 신념(틀)을 합리적으로 수정하는 데에 있다.
경험하지 않고 알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실제 경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경험한 것과 같은, 일종의 간접 체험이 가능한 게 인간의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상상할 수 있는 능력과 상상만으로 체험한 것과 같은 것. 그것을 우리는 공감이라 부르기도 하고, 이해라고도 부르기도 하는데, 나는 깊은 이해가 공감이라고 여긴다. 심지어, 언어로 표현하지 못해도 충분히 알 것 같고 연결되어있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감정이 충분히 열려있다면, 감각 수용체가 순조롭게 작동한다면 가능한 일이다. 그럼, 나와 별로 상관없는 영국의 할아버지가 겪는 실업 문제나 내가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나라의 내전에도 마치 내가 겪는 것처럼 아파하고 고민하게 된다.
내 주관적 현실의 영역을 넓혀가는 것과 동시에 기이하게 반복하는 주관적 경험에서 일정한 거리를 확보하여 관찰자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 모두가 그렇겠지만, 나는 내 경험의 주체이며, 내가 경험하는 세계의 유일한 목격자다.
따지고 보면, 객관적 현실이란 관념적으로 존재할 뿐 이 세상은 물리적 세계에 대한 각자의 주관적 현실만이 존재한다. 난 경험적으로는 내 주관적 현실 안에서 갇혀 살지만, 가끔은 공감이라는 비물질적인 형태로 타인의 현실에 접근을 시도한다. 예술 작품에 대한 반응도 마찬가지다. 시공간을 넘어선 강한 연결을 경험한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고3, 토요일 어느 낮, 몸이 뒤틀려 숨을 쉬지 못하고 쓰러져갔던 그때, 나는 아직도 그때에 머물러 있는 건 아닐까.
지칠 때마다 자꾸만 회귀하는, 나만의 지점은 그 환한 낮에 사람들 사이에서 정신이 아득해지던 순간이다.
내 공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