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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히 라 Apr 10. 2021

부처님이야기

영화 ㅣ 리틀 부다 (Little Buddha, 1993)

리틀 부다 (Little Buddha, 1993)   

1994.12.31.140분, 미국    


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출연: 키아누 리브스, 루우쳉 잉, 크리스 이삭



사백아흔아홉 번의 죽음과 윤회

제물에 바쳐질 염소가 죽음을 앞두고 도살자에게 웃음을 보였다. 이제 곧 죽을 염소의 의아한 행동을 보고 그가 이유를 물으니 "499번 염소로 태어나 제물로 바쳐졌지만 이번에 죽으면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에_ 너무 기뻐서" 라고 염소는 답한다. 그는 칼을 들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염소가 눈물을 흘렸다. 방금 전까지 기쁘다던 그 염소가 우는 모습을 보고 왜 이제 눈물을 흘리냐고 물으니 "당신 때문에 슬퍼서 운다. 내 첫 생에 때 나 또한 당신처럼 염소를 제물로 받쳤다. 당신도 나처럼 많은 염소를 죽인 걸 생각하니 슬프다"


꼬마 승려들의 수업시간에 들려주는 이 우화를 시작으로 리틀부다 영화는 시작된다.

이 짧은 이야기는 불교의 윤회사상을 담은 영화의 간략한 전개를 압축했다고 볼 수 있다.



윤회란, 생을 마친 영혼이 다시 이 세계에 태어남을 일컫는다.


첫 생애에 인간의 몸으로 저지른 업보로 인해

후에 499번의 윤회를 거듭해야 했던 염소의 그 기쁨은 '눈물'이라는 물질로 모두 담아내지 못할 것이다.    




라마 노부의 환생 찾기

영화가 나온지는 꽤 되었지만, 나는 이 영화의 제목만 본 적이 있었을 뿐 실제로 감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러다 그때의 지난 휴일에 '항마촉지인'이라는 걸 메시지로 보내준 이가 있었기에 이 영화를 다운받게되었다. 입에도 잘 붙지도 않는 이것의 뜻은 [ 악마를 항복시키는 것 ] 이라며, 이제 우리가 화가 나거나 비정상인들이 활개를 친다면 이 제스처를 하자며 -  유레카를 발견한 것 마냥 메시지를 보낸 이가 있었다.


  

항마촉지인 [ 降魔觸地印 ]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  석굴암 본존불


좌선할 때의 손 모양에서 오른손을 풀어서 오른쪽 무릎에 얹고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는 손 모양으로, 이는 석가모니가 수행을 방해하는 모든 악마를 항복시키고 성취한 정각(正覺)을, 지신(地神)이 증명하였음을 상징함.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불상은 - 한 손은 핀 채로 다리에 올려놓고, 다른 한 손은 동그라미를 그리는 동작만 있는 줄 알았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일명: 한푼만줍쇼)



불상의 종류와 그 손동작으로 의미하는 바가 다르다는 걸 토요일 아침, 침대 위에서 검색하던 나에게 "하선생도 어서 리틀부다를 꼭 보도록 해!" 라며 영화를 추천받았다. (리틀부타를 방금 보고 득도를 향해가던 그분은 나를 갑자기 하선생이라 부르기 시작함)  순환이나 환생, 그러한 개념이 동양에서는 당연히 주변에 있어왔다면, 서양의 경우, 그 개념을 지극히 받아들이는 것이 힘들다기보다는 그러한 개념에 노출된 이가 별로 없는 것이 현실일 테다. 아무래도 그렇기 때문에 서양이 동양을 신비롭게 여기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한 시각에서 이 영화를 서양인이 만들었다는 점은 과히 주목할만하다. 영화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Bernardo Bertolucci)는 15세 때 단편영화를 처음 만들었다고 한다. 영화 - 몽상가들도 이분이 만들었다고 한다. (야해서 기억) 


나의 아빠는 절에 다니시곤 하셨는데 그덕에 몇 해 전 석가탄신일에 예천에 있는 한 법당에 함께 가게 되었다. 석가탄신일을 맞이하여 스님은 부처의 탄생을 이야기해 주셨다. 어릴 때 교회나 법당에 가서 설교 같은 것을 들으면 어찌나 재미가 없었는데 그날은 일방적인 가르침이 아닌 누군가의 일생을 들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스님의 말씀에 대한 나의 몰입도가 좋았던 거 같다. 그때 들은 이야기가 영화 속에 그대로 나왔기 때문에 나는 나의 기억과 지식을 확인하며 영화를 감상하였다. (또한, 스님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군 vs. 영화를 사실에 근거해 만들었군<- 이런 생각도 함)  


노아의 방주나 홍해의 기적 등과 같은 기독교 신화는 믿지 않는다. 물론, 부처의 생애에서도 거짓뿌렁 같은 것이 빵빵 터지곤 한다. 싯다르타를 낳을 때 그 고통을 없애기 위해 주변의 나무가 스르르 내려와 돕는다든지_ 그 도움을 받고 이상한 소리를 내고 싯타르타를 낳는다. (싯다르타 엄마는 신음소리를 왜 저렇게 낼까,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나와 같은 생각일 듯) 태어나자마자 걷고 말을 하는 싯다르타 까지ㅋ (생후 1개월까지 아무것도 못하는데? 심지어 신생아는 초점을 맞추지도 못할뿐더러 보지 못하는데?)




줄을 너무 팽팽히 하면 줄은 끊어지고, 너무 느슨하게 하면 음악을 연주할 수 없다.


싯다르타는 태어나서 고통이라는 단어나 죽음, 노인 같은 추하거나 아름답지 않은 것은 보지 않고 자란다. 아버지는 그것이 그를 사랑해서라고 말하지만 그것이 어찌 진정한 사랑이겠는가? 세상을 구경하고 싶다는 아들에게 자신이 준비한 세상을 보여주지만, 싯다르타는 자신이 살아오던 세상이 아닌, 진짜 세상을 알게 된다.


결국 출가를 한 싯다르타는 (출가할 때 백마와 꼬봉을 데리고 나오길래 실망...... 난 당연히 혼자 나올줄 알았다. 뭐 결국 되돌려 보내 긴 하지만 ㅋ) 수련을 시작한다. 먹는 것 잠자는 것 같은 기본적인 욕구보다 오직 수련만을 한다. 그가 난사람이라는 걸을 알고 그의 첫 번째 제자들이 모이게 된다.



정말 감독에게 미안하지만, 수련하는 싯다르타에게 뱀이 다가오는 장면은 나 혼자 빵 터지고 말았다 !!
뱀이 다가올 때 분명 그 정도 크기 아니었는데 다가올수록 커지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 수련하는 그를 위해 우산이 되어 준 독사뱀은 경이로워야 하는데 나는 너무 때가 묻어서 그런가 웃겨 죽을 뻔 ㅋㅋ

 

그렇게 경이롭게 수련하던 그는 악사의 말을 듣게 된다.  



   줄을 너무 팽팽히 하면 줄은 끊어지고,    
너무 느슨하게 하면 음악을 연주할 수 없다.



그 말을 들은 싯다르타는 강가로 내려가 마을 소녀가 준 밥을 먹고 자신이 너무 한쪽에 치우쳐 수련을 해왔다는 사실에 그동안 잘못된 수행을 해온 자신에 대한 생각에 잠긴다. 하지만 목욕을 하고, 밥을 먹는 그를 본 제자들은 싯다르타를 욕하고 그를 떠난다. 내가 볼 땐 더 이상 배고프고 힘들어서 그 말을 받아들인 거 같은데 ㅋㅋㅋㅋㅋㅋ 난 너무 때가 묻었나 보다. 그렇게 난사람이 저런 것도 몰랐을까, 악사 선생도 아는 그것을 수련을 통해서도 몰랐을까? (그냥 배고팠나 보다 싶음.) 제자들이 떠나자 그게 아니라고 말을 하며 자신이 맞다면 물살을 거슬러 그릇이 올라갈 것이라고 말을 하는데 진심 그릇이 반대로!!!!!!!!!!!!!!! 이러니 내가 뻥쟁이라고 하는 거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 (싯다르타라면 자연의 법칙이 적용이 되지 않는 건가? 이 불공평한 세상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





하지만, 리틀부다 영화는 환생이라는 개념을 우스꽝스럽게 그려내진 않는다. 영화의 주된 내용은 환생이다. 라마 도제(Lama Dorje)의 환생을 찾는 임무를 띤 라마 노부가 그 후보들을 찾아 나선다. 시애틀의 한 건축가의 아들로 태어난 제시(Jesse / 예수 지저스와 비슷? 일부러?)는 그 후보 중 하나이다.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다른 후보가 아닌 제시가 꼭 진짜 라마도제의 환생이길 바랬다. 후보 2는 카트만두에 사는 꼬마이고 후보 3은 여자아이인데 나는 후보 3이 철저하게 교육되어 라마도제 환생으로 지목당할라고 안달 난 사기꾼으로 생각했었다.

 

 

자신이 너무 한쪽에만 치우쳐서 6년이라는 시간을 헛되이 보냈다는 걸 깨달은 싯다르타는 큰 나무 밑에서 중용의 길을 깨우치고 있었다. 그런데 다섯 소녀가 나타났다. 그 소녀들은 겁 모습으로는 천진한 마을 소녀들 같았지만 사실 암흑의 제왕인 마라의 다섯 딸들이었다. 그들은 오만, 탐욕, 두려움, 무지, 욕망의 화신이었다.


마라는 딸들을 보내 싯다르타의 수도를 방해하려 했던 것이다. 마라는 가장 교활한 방법으로 싯다르타를 유혹하려 했었다. 춤추고 노래 부르고 난리남 - 이때 3번째 후보 여자아이가 마라의 딸들이 싯다르타를 유혹하는 노래에 맞춰서 춤을 춘다. 이것이 내가 후보 3을 사기꾼이라고 생각한 결정적 이유이다!! 제시와 후보 2 꼬마는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고 첫 만남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후보 3은 계속 뭔가 거짓말을 하고 꾸며내는 듯한 느낌으로 내게 비춰졌다. 후보 2 꼬마가 제시와 친해져 제시의 모자 쓰고 다니지만 라마도제 환생은 아니길 바랬다. 온니 제시만이 라마도제의 환생이길 바랬다. 마라는 딸들은 노래와 춤을 추고 그중 한 명은(이쁘지도 않음 - 물론 다섯 모두) 싯다르타를 음흉하게 쳐다봄ㅋㅋ 그러다 막 술잔을 엎음 ㅋ


마라가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삶의 유혹을 변장시켰지만, 싯다르타는 형상과 현재를 꿰뚫어 보았다. 마라는 분노 했고, 다섯 딸들은 바람에 사라진다. (못생긴 다섯 화 신소녀들이 막 소리를 내며 바람에 날려감)


기독교에서도 오만, 탐욕, 두려움, 무지, 욕망의 화신처럼 판도라의 상자 안에 이러한 나쁜 개념들이 들어있다. 나는 그것들이 상자를 여는 순간 인간의 세상에 나왔다고 하는 이야기보다 이 이야기에 더 끌린다. 이유는 싯다르타가 이 못생긴 다섯 화신들을 바람결에 모두! 날려버리기 때문이다. 마라는 패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그는 아직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새뀌!!) 다시 공격했다!!!!!!!! (아까 쏟은 술이 물이 되어 그 속에서 마라가 싯다르타의 형상을 하고 나타남! 두둥!! )



싯다르타는 결국 마귀 군단과의 싸움에서 승리한다. 얏호 !


그의 사랑의 힘과 그가 깨우친 커다란 연민을 통해서, 그는 환상보다 초연함이 우선하는 위대한 고요를 성취했으며 자신을 넘어 도달했다. 그는 쾌락과 고통을 넘어 판단으로부터 분리되어 자신이 한때는 여자, 돌고래, 나무 , 원숭이였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그는 자신의 첫 탄생에서부터 수많은 생을 기억할 수 있었다.




그는 세상을 넘어서 볼 수 있었다.



결국 싯다르타는 만물의 궁극적인 실제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세상의 모든 움직임이 인과의 결과로 인한 것임을 이해했다.

그리고 그는 다른 모든 존재에 대한 자비 없이는 구원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 후로부터 싯다르타는 '깨달은 사람' 이라는 뜻인 부처라 불리게 된 것이다.






제시에게 부처의 일생을 그린 책을 주면서 제시가 그 동화책을 읽으면서 부처에 대해 알아가는 장면은_ 영화를 보는 누구에게나 따뜻함을 선사한다. 제시의 아빠는 처음 환생이니, 윤회니, 하는 것을 믿지 않지만 그의 친구의 죽음을 맞이하면서 생각을 바꾼다.



홍차를 담고 있는 그릇이 깨지더라도 홍차는 여전히 홍차이다.  

아직 의심이 많은 제시의 아빠에게 찻잔을 깨며 나누는 대화는 영화의 핵심일지 모르겠다.


“이 조각은 더 이상 찻잔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여기 흩어진 이 홍차 또한 더 이상 홍차가 아닙니까?”

“아니요.”

“찻잔은 그릇이고 홍차는 내용물입니다. 그릇이 깨지거나 바뀌었다고 해서 내용물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그릇은 육체고 내용물은 영혼입니다.
 영혼은 여기서 저기로 옮겨갈 뿐 그 자체가 바뀌는 것은 아니지요.

 그것이 환생, 바로 윤회입니다.”

 


각각의 아이들이 라마 도제의 육신과 정신, 그리고 말씀의 현신으로 환생한 것으로 영화는 끝맺는다.       

리틀부타를 검색하자 어떤 지식인은 이런 글을 남겼다.



부처의 깨달음의 과정을 어느 고승의 환생이라 믿어지는 소년의 눈으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참신한 영화였습니다.
좀 더 불교틱한 영화를 원하신다면 '매트릭스1,2,3'을 보시는 게 나을 듯싶네요.



매트릭스가 그런영화였다니!!!

나는 매트릭스 = 초록색 숫자 영화 이렇게 기억하는데 _ 윤회를 더 깊이 알아보기 위해 매트릭스 123 정주행을 해보도록 하겠다. 덧붙여서, 동물로도 인간으로도 환생한다면 지구 안의 생명의 수는 늘 평균치 일까? 그러니까 멸종위기의 동물이 많아지면서 인구가 증가하는 이사태가 이걸로 설명이 되나 ㅋ








병맛스러운 이상한 생각을 하는 그날의 내가 씀.












그러니까 이 글을 2016년에 썼던 글이다. 그때도 참 쓰고 지우고 또다시 보고 지우고 쓰기를 반복했었는데_ 

이걸 쓸 때만 해도 나는 영화 드리마에 대한 글을 많이 쓰고자 했었다. 그런데 결국 해야지 하고 다시 또 해야지 다짐이나 하는 나를 발견한다.


글을 쓰는 건 참 어렵다. 시간을 내기 어렵고 생각을 정리하기 어렵다. 그저 차를 타고 달릴 때는 별 생각이 다 들다가 막상 자판을 보면 마우스만 움직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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