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모험

낙화와 비상의 사이에서

by 하이진


<잊힌 책의 독백>


나는 자음으로 시작해 모음과 섞였다.

그렇게 단어가 되었다.

문장으로 자라났다.


하얀 백지 위에 빅뱅이 일어나고 작은 세계가 태동했다.

나의 창조자는 서툴지만 다정한 글을 아는 인간이었다.

즐겁게, 때로는 막막하게 창조되어 갔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문단이었다.

문단들이 모여 사단이 되고 군단으로 규모가 커졌다.

그러므로 나는 확신했다.

완결이 머지않았음을...


완벽한 줄 알았던 나의 문단은 오합지졸이었다.

오합지졸은 전투에서 승리를 가질 수 없었다.

패잔병은 깊은 어둠 속으로 끝도 없이 낙하했다.


툭.


네모난 등이 닿았을 때

수많은 동류들이 이곳으로 흘러들었음을 공기로 알아챘다.

내가 도착한 곳은 글자들의 쓰레기장이었다.

그렇게 나는 어떤 이의 서재에도 들지 못했다.



<유머는 나만 아는 걸로>


나는 자음으로 시작해 모음과 섞였다.

기분 좋은 울림이었다.

뭐든 될 수 있어서 좋았다.


나의 주인은 유머를 아는 이였다.

재미있는 세계가 될 것 같았다.

부지런히 단어를 모아 완결로 나아갔다.

신나는 모험이었고, 짜릿했다.

당신의 도파민 내가 책임집니다.


나는 그렇게 빛나는 별이 되는 줄 알았다.

어이쿠 오해였네.


저기요?

유머코드가 이렇게 안 맞아?


딱 기다려요.

나 다시 올라갈 때까지.

한 줄기의 빛이 네모난 책을 비추었다.

희망고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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