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新) 별주부전 10

해치웠나?

by 하이진

별주부는 서신을 작게 말아 특수 제작된 방수 캡슐에 넣었다. 이제 그 캡슐은 수궁의 비밀 전령인 날치 편에 실려 심해를 헤엄치고 있었다.


가볍게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난 별주부에게 다음 스텝은 명확했다. 토끼 회장의 집무실로 가서 ‘용궁 시장 진출을 위한 그랜드 오프닝 세리머니’ 기획안을 올리는 것. 토끼 회장이 제 발로 수궁행 유람선에 올라타게 할 화려한 미끼를 던질 차례였다.


사무실을 나서는 별주부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복도에서 마주친 동료 사원들이 "지사장님, 축하드립니다!"라며 인사를 건넸지만, 별주부는 그저 인자한 미소로 화답할 뿐이었다.

‘회장님, 비트즙으로 낸 성과는 여기까지입니다. 이제는 직접 몸으로 보여주셔야겠어요.’


그렇게 토끼 회장을 구슬려 도착한 곳은 럭셔리한 대형 백화점의 스포츠웨어 매장이었다. 별주부는 총총걸음으로 뛰어가는 토끼 회장을 따라 느긋하게 움직였다.

‘이것도 다 영업의 일환이지.’


비트즙으로 끌어모은 두둑한 돈주머니를 두드리며 모처럼 등껍질에 힘이 들어갔다. 돈 내는 놈이 보스니까.

그사이 매장에 도착한 토끼 회장은 다양한 디자인의 수영복을 놓고 고심 중이었다.


“원피스? 비키니? 아니야. 요즘에는 래시가드가 대세던가? 올인원?”


“회장님의 전체적인 라인과 앙증맞은 귀를 생각하면, 역시 비키니 아니겠습니까?”


“흐음... 딱히 가릴 건 없는데.”


“그럼, 아예 벗고 가시는 것도 괜찮습니다.”


어차피 작업하려면 포장지는 필요 없지,라고 별주부는 생각했다.

“그래도 그건 예의가 아니지 않겠나.”


“바다에서는 입고 있는 게 오히려 예의에 어긋나는지라. 저도 육지의 법도에 맞춰서 갖춰 입었을 뿐, 용궁에서는 본연의 모습으로 살고 있지요.”

“그래도 육지 대표로서 그럴 순 없지.”

비키니를 걸친 토끼 회장이 전신거울 앞에서 연신 자태를 확인했다. 그것은 육해공에서 가장 패셔너블한 토끼가 되려는 야심 찬 시도였으나, 결과적으로는 분홍색 고무줄에 낀 털뭉치였다.

하지만 관료주의 사회에서 잔뼈가 굵은 별주부는 본능적으로 박수부터 쳤다.


“브라보! 이건 영락없이 회장님을 위해 제작된 수영복입니다.”


“그런가.”


시큰둥한 토끼 회장의 반응에 살짝 식은땀을 흘리긴 했지만, 아부는 기세였다.

“그러지 마시고 종류별로 싹 장만하시는 건 어떠실지요.”

“탁월한 생각이야. 자네가 괜히 빠르게 성장하는 게 아니었어.”

토끼 회장은 무심한 눈길로 입어본 것들 중 몇 개를 지목하며 당근 주스를 마셨다. 별주부는 쇼핑 시간이 길어지길 원치 않았기 때문에 빠르게 카드를 긁었다. 그러면서 복리후생비로 처리해도 문제가 없을지 잠깐 고민했다.

‘접대비는 아니잖아?’

토끼 회장의 비키니 구입비는 용궁 회계 규정 제104조, '외래종의 안구 보호를 위한 시각적 예절 유지비' 항목으로 처리하기로 했다.


해당 규정의 실존 여부는 해저 3,000미터 뻘밭 동굴에 은둔 중인 문어할멈이나 알 법한 일이었으나, 별주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만약 누군가 이 지출의 정당성에 의문을 품는다면, 직접 심해까지 내려가 확인하는 성의 정도는 보여야 마땅했다. 그 정도의 수고로움조차 감수하지 않는 게으른 자들의 항의까지 일일이 신경 쓸 생각은 없었다.


용궁 지사의 오픈 날짜도 확정되었고, 토끼 회장 역시 그랜드 오픈식의 귀빈 참석을 수락했다. 모든 톱니바퀴가 기름칠이라도 한 듯 순조롭고 완벽하게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


‘... 이제 다 끝난 건가?’


그 찰나의 안도감이 뇌를 스친 순간, 별주부는 화들짝 놀라며 제 입을 틀어막았다. 취소, 당장 취소해야 했다. 고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불문율이자, 서브컬처의 세계에서는 죽은 자도 벌떡 일으켜 세운다는 전설의 부활 주문.


“해치웠나?”


그것은 이른바 ‘클리셰’라 불리는 무시무시한 트리거였다.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서사의 인과율이자, 평화로운 일상에 재앙의 깃발을 꽂는 신호탄이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별주부는 몸에 붙은 부정을 털어내듯 간절하게 세 번이나 주문을 읊조렸다.

됐겠지?


별주부는 ‘됐겠지’를 안 했어야 했다.




[작가의 한마디]


최근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 속에서 발견한 황당하고 기발한 표현들에 감동을 받아... 결과물이 평소보다 조금 더 해괴해진 것 같아 걱정이 앞섭니다.

하지만 이 '막 나가는' 즐거움을 멈출 수가 없었네요. 부디 너그럽고 즐겁게 봐주시길 바랍니다. 저를 이토록 이상하게(?) 만든, 제 영혼을 강타한 문장 하나를 아래에 소개해 드립니다.


<그 술(팬 갈랙틱 가글 블래스터)을 마시는 기분은, 레몬 한 조각을 감싼 거대한 황금 벽돌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는 것과 같다.>


대체 어떤 맛이고, 어떤 숙취이길래, 이렇게 묘사했을까 너무 궁금해지네요. 오늘 제 글이 여러분께 기분 좋은 '황금 벽돌' 한 대가 되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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