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한다는 것은 조수간만처럼
끊임없이 침식해 들어오는 인생의 무의미에
맞서는 일이기도 하죠.
-김영하
은유.《쓰기의 말들》. 필사. 82.P185.
왜 글을 씁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얻었다.
은유 작가는 그 답으로
'거짓 자아'가 아닌 '자기 자신'으로 살기 위하여.
라고 답했다.
어제는 양산도서관에서 주관하는
은유 작가. 《해방의 밤》. 저자와의 만남에 다녀왔다.
저자 《쓰기의 말들》185페이지까지, 82일째 필사하고 있다.
82일간의 책 속 그녀와의 만남. 오늘은 실제 그녀를 만나는 날이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폭염 경보 문자가 날라왔다.
저자와의 만남은 오후 2시지만 아침 일찍
저자 특강이 있는 양산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다가 참석하기로 마음먹었다.
평소처럼 반바지, 흰 T 셔츠를 입고 가려다가
한복으로 갈아입었다. 얼굴에 로션을 바르고
머리에 젤도 발랐다. 거울을 몇 번이나 봤다.
아침 7시 출발했다.
내비게이션이 도착 시각을 알렸다.
(7시 45분 도착. 부산->양산도서관)
백양터널을 입구, 출근 시간
상습 정체구간이지만 밀리지 않았다.
터널을 통과해서 양산으로 향하는 고속도로 길.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흘러가고 산에는 녹음이
짓게 드리워져 있었다.
들판에는 벼가 골프장 잔디처럼 푸르게
펼쳐져 있었다.
창문을 열고 크게 심호흡했다.
몸속으로 푸르름으로 물드는 기분이었다.
양산도서관 도착!
'아뿔사, 오픈 시각 9시'부터라는
안내표찰이 문 앞에 있었다.
부산 도서관처럼 아침 6시에 오픈하는 줄 알았다.
마침 도서관 앞에 '양산 워터파크' 공원이 있었다.
벤치에 앉아 《해방의 밤》 책을 펼쳤다.
갑자기 '치직 쏴~'하며 분수대 물줄기가 솟아올랐다.
연못에는 연꽃과 이름 모를 수초들 사이로
손바닥 크기 물고기가 분주히 움직였다.
푸른 하늘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있다.
갑자기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겨드랑이가 시원해졌다.
"도서관이 문을 열었으면 어쩔 뻔했어.
이게 무슨 호사냐?"
해방의 밤 책을 읽었다.
매미들이 일제히 울었다가 그쳤다가를 반복했다.
간간이 새들이 날아와 멀뚱 멀뚱 지저귀다 날아갔다.
뭐가 해방되었는지 모르지만
해방된 기분이 들었다.
드디어 오후 2시. 저자와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실물(?) 은유 작가와 처음 만나는 시간.
그녀는 흰색과 검은색이 섞여있는 샌들을 신었다.
치마는 베이지색 치마, 상의는 군청색 브라우스를 입었다.
머리카락은 갈색으로 끝만 웨이브를 준
중간 길이 퍼머 머리를 하고 왔다.
실눈으로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 그녀 모습과 목소리에
세상 근심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웃는 모습은 강의 내내 이어져 행복했다.
드디어 저자 사인회 시간이 되었다.
나는 긴 줄 5번째 차례에 섰다. 준비해 간
필사 노트와 책을 들고나갔다.
차례가 다가올수록 가슴이 벅찼다.
드디어 내 차례다.
도서관 진행자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했다.
필사 노트와 《쓰기의 말들》 책을 내밀었다.
그녀의 하얗게 웃는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아~ 감동입니다."
그녀는 내가 쓴 필사 노트를 넘기며
경이롭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기분이 묘했다.
유명 작가에게 인정받는 기분?
쌍여있던 뭔가가 해방되는 느낌이 들었다.
《쓰기의 말들》필사하고 블로그에 한 편씩 글을 올리면서
이 짓(?)을 왜 하지. 포기하고 싶었던 때가 많았다.
근데 오늘 비로소 필사하기 잘했다는 마음이 들었다.
이왕이면 완성된 노트에 사인을 받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필사하고 글을 쓰면서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남이 아닌 내 생각 내 경험을 써 내려가다 보니
나를 알아가는 느낌이 든다.
어떤 때 기분이 좋은지, 어떤 때 울화통이 터지는지
내가 무얼 좋아하는지, 어떨 때 질투가 심한지...,
쓰기의 말들 책을 집필하게 된 동기도 알게 되었다.
작가는 책을 읽으면서 수집한 천 개가 넘는 명언으로
365편 글을 쓰자고 출판사와 계약했는데
중복되는 것 다 빼고 104개 명언으로
글을 쓰게 되었다는 출판 뒷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진짜 힘들게 썼다'라는 말을 덧 붙였다.
더 책에 애착이 갔다.
나는 필사하고 글을 쓰면서 어느새
'거짓 자아가 아닌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걸
저자와의 만남을 통해 확신하게 됐다.
오늘 필사 내용에도 이런 말이 있다.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그 뿌리칠 수 없는
물음에 답을 구하기 위해 글쓰기 문을 두드린다"라고
또,
"구체적인 '사실'의 옷을 입은 기억.
이런 기억 복구 작업인 글쓰기는
과거의 회상이면서 현재의 보호막이 되어 준다."
라고 말한다. 아래 예시를 들면서
'장사할 때 안 좋았다', '사람들 때문에 힘들었다'
대신 아래와 같이 표기해야 한다고.
“많이 팔기 위해 속이고 속고 하면서 가면을 써야 했다. 이 년쯤 일을 하고 나니 새벽 퇴근길에 누군가에게 욕을 퍼붓고 속 시원하게 무언가 때려 부숴야 하겠다는 충동이 일었다. 이대로는 내가 미쳐 버리겠구나 싶어서 그 일을 그만두고 쉬었다."
과거 힘들고 불행했던 기억들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러기에 위와 같은 글쓰기(복구작업)을 통해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고 끄집어 내어 글로 쓰고 재해석하면서
앞으로 살아가는 데 힘이 되고 내가 더 단단해진다.
'거짓 자아로 살지 말았으면 좋겠다.'
"자기의 어떤 아픈 거
암 걸렸던 거나 이런 거 말하면 뭔가
약점이 되는 그런 사회적 분위기가 있다.
그래서 자기 정리를 좀 해야 된다.
내가 드러내지 못하는 것 들을 구냥 두면
결국 곪아서 나를 공격하게 되기 때문이다.
거짓 자아가 아닌 자기 자신으로
살기 위하여 읽고 써야 된다.
힘들고 어려울 때 책을 읽다 보면
나만 이런 건 아니구나라고 알게 된다.
이게 일상에서 보면은 나 빼고 다 행복한 것 같고,
상대적 박탈감도 느끼게 된다.
책 보면 무언가 가난에 대한 이야기
어떤 자기 상실에 대한 이야기 굉장히 많다.
그래서 나만 이런 건 아니구나
내가 비정상은 아니구나라는
위안을 줄 수 있고
내가 이 가난한 걸 왜 부끄러워하지
내 질병을 내가 왜 부끄러워하지?
사람이 살다 보면 다 아픈데...,
그래서 어떤 숨기고 싶었던 나 자신을 좀 인정할 수 있는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게
저는 책과 읽고 쓰는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
은유 작가의 말을 듣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인들은 퇴직 후 훌훌 털고 여행 가고
인생을 즐기는 것 같은데,
왜 나는 맨날 책상에 앉아서 책을 읽고,
필사하고, 글 쓰고.
왜 짓을 하지?라는 질문에 답을 하는 것 같았다.
내 글 쓰기 사명을 되뇌어봤다.
"글쓰기로 삶을 풍요롭게!
당신의 이야기가 누군가의 희망이 됩니다."
《행방의 책》을 읽은 독자가 보내온 글을
소개하면서 특강을 마무리했다.
"이 세상의 여러 중요한,
보이지 않는 존재들을 생각했습니다.
제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너무 나만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
나의 성장, 일상이 있기까지는 수많은 존재들의
지탱하는 힘이 있었다는 것을 더 기억하겠습니다.
눈에 띄지 않게, 느리게라도 언젠가 한 벽과 나무를 뒤덮는
담쟁이의 한 발자국을 작은 혁명처럼 공들여 바라보고,
작은 민들레에 게라도 해를 가하지 않고
살아가는 제가 되고 싶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시 한번
왜 쓰려 합니까?
김영하는 기록한다는 것은 조수간만처럼 끊임없이 침식해
들어오는 인생의 무의미에 맞서는 일이기도 하죠.라고 말했다.
은유 작가는 거짓 자아를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글을 쓴다고 말한다.
저는 은유 작가에게 보낸 독자의 편지글처럼
눈에 띄지 않게 느리게라도 벽을 오르는
담장이처럼 한 발자국씩 다른 사람을
돕는 희망이 되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좋은 경험이나 이야기는 지인 10명 한테 전할 수
있지만, 책을 내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전할 수 있다.
오늘도 최고로 행복하세요!
"당신의 이야기가 누군가의 희망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