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할 수 없는 두 글자

관계의 물리학

by 정글


봄비는 그냥 내렸고, 수선화는 그냥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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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먼저 수선화를 심문했다. 봄비가 내려서 꽃을 피운 것인지, 아니면 봄비와 상관없이 오늘을 개화 일로 정하고 있었는지를 물었다. 수선화는 묵비권을 행사했다.


나는 하는 수없이 봄비를 심문했다. 꽃을 피우려 애쓰는 수선화를 도우려고 내린 것인지, 아니면 내리고 보니 수선화가 피고 있었던 것인지를 물었다. 봄비도 아무 말이 없었다. 수사는 난항을 겪었다. 나는 꽤 유능한 탐정이라 사건 현장을 중심으로 면밀한 탐문수사를 벌였지만 유효한 제보가 없었다.


초봄이고 한밤중의 일이라 목격자 식물이 따로 없었던 것이다. 진술이나 물증이 없어 둘의 관계를 입증하기가 힘들지만, 나는 두 피의자가 예사로운 관계가 아니라는 심증을 굳혔다. 둘 다 짠 듯이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지만, 수선화는 봄비의 고마움을 잊지 않는 듯하고, 봄비는 그런 수선화에게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 둘의 공모 관계를 더욱 의심하게 했다. 나는 다음과 같이 한 줄의 수사보고서를 작성하고 내사를 종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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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림태주 작가의 《관계의 물리학》책을 읽다가 '그냥'이라는 단어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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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사전에 '그냥'이란 단어를 찾아봤다.

1. 어떠한 작용을 가하지 않거나 상태의 변화 없이 있는 그대로.

2. 아무 뜻이나 조건 없이.

3. 그대로 줄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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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수선화와 봄비의 관계를 탐정이 범인을 수사하듯 묘사했다. 연이어 수선화와 봄비 관계를 인간관계로 자연스럽게 이어갔다.

사람 사이에 그냥 편해지고 그냥 좋아지는 관계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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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편안함은 누군가가 얼마큼 감수한 불편의 대가이다. 일방적인 한쪽의 돌봄으로 안락과 안전이 유지된다면 결코 좋은 관계가 되기는 어렵다. 봄비와 수선화의 관계처럼 그것이 '그냥'이 되려면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참음도 필요하고, 주고도 내색하지 않는 넉넉함도 필요하고, 고마움을 잊지 않는 마음 씀도 필요하다."라고.


문득 '그냥'이라는 단어는 나쁜 단어일까? 좋은 단어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그냥 해서 나빴던 기억을 떠올려봤다.


20대 초반 때 일이다. 친구가 요즘 되게 괜찮은 모임에 나가는데, 사람들이 다들 열정적이고 좋아. 너도 그냥 한번 같이 가보자.라고 해서 그냥 친구 따라갔다. 알고 보니 순수한 친목 모임이 아니라 사이비 종교집단이었다. 빠져나오기까지 친구와 종교집단 관계자와 실랑이를 벌인 후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아내는 부동산에 투자하면 돈을 많이 벌수 있다는 우체국 고객의 말을 믿고 그냥 거액을 투자했다, 나중 알고 봤더니 기획부동산 사기였다. 소송을 하는 등 힘든 시간을 보냈었다. 결국 수억 원 돈을 날렸다.


지인 김선배는 임영웅을 좋아한다. 임영웅이 공연하는 곳이면 전국을 따라다닌다. 그의 얼굴이 인쇄된 옷을 입고, 물품을 산다.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모여 행사도 한다. 시간과 돈을 투자하며 전국을 누비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어 물었다. 뭐가 좋아서 그렇게 따라다니고.


딱 한마디 했다.

"그냥 다 좋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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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5달 된 손녀와 영상통화를 했다. 휴대폰 속 손녀는 멍하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하회탈로 변했다. 까꿍, 까꿍! 손녀 관심을 가져 보려고 애교를 부렸다. 손녀는 엉금엉금 기어 엄마 손에 있는 핸드폰을 잡아당겼다. 손녀가 왜 좋으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도


"그냥 다 좋다."라고 말할 것 같다.


글을 쓰다 보니 그냥이라는 말이 좋은 말인지 나쁜 말인지 따지는 게 시간 낭비는 걸 알았다. 사전에 다 나와있다. 그냥이라는 단어가 아무런 뜻이나 조건 없이라는 뜻인데 말이다.


림태주 작가는 수선화와 봄비 관계 묘사하며 인간관계로 결론을 맺었다. 그의 글을 읽으며 감탄했다. 나는 언제쯤 이런 글을 쓸 수 있을까. 글 쓰는 데 자신감이 없어진다. '나만의 문체'를 찾으라는 조언은 언감생심 멀게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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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는 봄이 되면 그냥 씨를 뿌린다.

직장인은 아침이 되면 그냥 출근한다.

야구 선수는 운동장에 나가 그냥 공을 던진다.


'그냥'은 꾸준함과 반복이라는 다른 이름이다. 씨앗이 열매 맺기를 기다리는 농부의 마음처럼, 작가도 책상에 앉아 그냥 읽고 그냥 쓰는 것이다.


결국 '그냥'은 나쁜 단어도, 좋은 단어도 아니다. 시간과 노력이 축적되어 무르익은 상태를 가장 담백하게 표현하는 두 글자라 생각한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그냥'의 날들을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가리라 믿는다. 사람들과 관계, 일, 글쓰기. 보이지 않는 곳에서 행해진 수많은 인내와 헌신의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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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새벽 4시 30분에 여느 때처럼 그냥 일어났다. 회원들과 미라클 모닝을 그냥 했다. 밋밋하고 맛없는 글을 그냥 쓴다. 그냥 더 좋아질 거라는 믿음을 품고, 아침 루틴을 그냥 한다.


당신의 하루가 수선화와 봄비 같은 만남이길, 그냥 그런 하루가 이길 소망한다.

그냥이라는 고양이 한 마리 분양받을까 보다.


오늘도 최고로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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