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가 자라는 이유는
오직 속을 비우기 위해서다
파가 커갈수록
하얀 파꽃 둥글수록
파는 제 속을 잘 비워낸 것이다.
꼿꼿하게 홀로 선 파는
속이 없다
<출처 : 꽃, 이문재>
퇴직한 동료를 만나러 가는 길,
기분이 좋고 들떠야 하는데
왠지 설거지를 하지 않고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다.
여행 다녀오면 설거지통 그릇이
이끼 낀 것처럼 미끈미끈했던
경험처럼, 마음이 무겁다.
왜지?
내 욕심 때문이다.
그냥 만나면 즐겁고
행복했던 사이인데,
뭔가를 부탁하러,
채우려 가기 때문이었다.
연락 안 하던 내가 불쑥
만나자고 하기 뭐 했다.
먼저, 성탄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이쁜 이모티콘 이미지도 함께!
'메리 크리스마스' 답장이
GIF 이미지가 이뻤다.
한참을 톡을 보다가, 부탁 글을 썼다.
"국장님, 시간 되면 차 한잔해요.
제가 오후 5시경 해운대 집 앞으로 갈게요"
몇 번을 지웠다가 다시 썼다.
카톡 전송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이 무거웠다.
그냥 만나자는 게 아니라,
부탁할 게 있어서 만나자는 것을
나는 알고, 상대도 알 것 같았다.
순수한 만남이 아니었다.
내가 부탁할 일이 있으면
과감 없이 하라고,
나머지는 부탁받은
사람의 숙제라고 혹자는 말하지만
그게 그리 쉽게 되지 않았다.
마음 한편에 빚진 기분이 남는다.
파는 자랄수록 속을 비운다.
더 비우기 위해서인지
파 안쪽을 까보면 하얗다.
파가 커갈수록 하얀색이
더 두터워진다.
비우고 비우다 보면
하얗게 하얗게 비워진다.
더 비울 게 없으면 하얀색이
밖으로 튀어나온다. 그게 파꽃이다.
어제 성탄절이었다.
하늘에서 더 비우고 비우기 위해
자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그것도 모자라 구유에서.
그런 날, 성스러운 날이었는데
난 채우려고 욕심부린 내가 부끄러웠다.
대신 오늘, 하얗게 하얗게
비우는 하루이길 소망한다.
파처럼 내 속을 다 보여주고,
비우고 비워 하얀 꽃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 되길!
채우려는 관계는 무겁다.
비우는 관계는 가볍다.
파꽃처럼 하얗게 피어나는 관계,
그런 관계, 우정이길 희망한다.
오늘도 최고로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