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묻는다.
어제 주일예배 설교 도중 목사님이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를 인용했습니다.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그러면서,
신앙인으로서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한 번이라도 뜨거운 헌신의 삶을 살아보았느냐?
또는 뜨겁게 한번 간절하게 그렇게 부르짖어 기도해 보았느냐?
나의 삶을 붙들어 달라고 애끓는 간절함으로 그렇게 한번 하나님께 매달려 보았느냐?
순간, 가슴이 뜨끔했습니다.
연탄재만큼도 내가 못한 존재인가?
너에게 묻는다
-안도현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반쯤 깨진 연탄
언젠가는 나도 활활 타오르고 싶을 것이다
나를 끝닿는 데까지 한번 밀어붙여 보고 싶은 것이다
타고 왔던 트럭에 실려 다시 돌아가면
연탄, 처음으로 붙여진 나의 이름도
으깨어져 나의 존재도 까마득히 뭉개질 터이니
죽어도 여기서 찬란한 끝장을 한번 보고 싶은 것이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뜨거운 밑불 위에
지금은 인정머리 없는 차가운, 갈라진 내 몸을 얹고
아랫쪽부터 불이 건너와 옮겨붙기를
시간의 바통을 내가 넘겨받는 순간이 오기를
그리하여 서서히 온몸이 벌겋게 달아오르기를
나도 느껴보고 싶은 것이다
나도 보고 싶은 것이다
모두들 잠든 깊은 밤에 눈에 빨갛게 불을 켜고
구들장 속이 얼마나 침침하니 손을 뻗어 보고 싶은 것이다
나로 하여 푸근한 잠자는 처녀의 등허리를
밤새도록 슬금슬금 만져도 보고 싶은 것이다
신혼 초, 단칸방 전세를 살았습니다. 연탄이 꺼지면 번개탄으로 불을 지피기까지 한참 걸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연탄불이 꺼지지 않도록 신경을 곤두세웠습니다.
어떤 날은 자다가 불이 꺼지면 서로 꼭 껴안고 잤습니다. 자다가 일어나 불을 지피는 일은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으니까요.
퇴근 후 돌아오면 아내는 연탄불 위 세숫대야에 물을 데워 내 발을 씻어주었습니다. 나는 우쭐했습니다. '남편을 잘 섬기는군, 가정교육을 잘 받았네!'라고.
이 행복도 얼마 지나지 않아 깨어졌습니다. 어느 날 아내가 여고 동창회에 다녀온 후 발을 씻어주지 않았습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나는 엄마가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면 늘 발을 씻어주어서 그래야 되는 줄 알았는데..."라며 동창회에서 바보 같은 짓이라고 비웃음을 당했다고 했습니다.
연탄을 볼 때마다 신혼 초 아내의 복사꽃 같은 살결과 복스러운 손으로 내 발을 씻어주던 행복에 입꼬리가 올라갑니다.
어느덧 환갑이 지났습니다. 머리에 염색하지 않으면 하얀 연탄재처럼 변합니다.
난 지금껏 살아오면서 연탄불처럼 뜨겁게 살아본 적이 있는가? 생각해 봤습니다.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굳이 비슷한 예를 든다면 온몸을 불살라 밤새 술을 마신 기억이...
목사님 설교를 들으며 깨달았습니다. 나는 신앙도, 일도, 어떤 것도 뜨겁게 불살라 보지 못했다는 걸.
살 날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뜨겁게 연탄불처럼 활활 타오를 수는 없더라도 마지막 남아 있는 온기를 다른 사람에게 이어주고 싶습니다. 내 온기를 이어받은 사람이 활활 타오르다 또 이어지기를 바라면서.
여행 가려면 무릎 아프고, 음악 듣자니 귀가 잘 안 들리고, 책을 읽자니 눈이 잘 안 보이기 전에. 마지막 남은 불씨를 활활 타오르게 하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는 촛불입니다. 타오르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타오르며 빛을 전하고 사라지는 존재.
연탄재도 한때는 뜨거웠습니다. 그 뜨거움으로 누군가를 따뜻하게 했습니다. 아직 살아있다는 건 재가 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내 속엔 여전히 온기가 남아 있고, 다음 연탄에게 불씨를 건네주는 역할이 남아 있습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오래 탔느냐가 아니라, 그 불이 누구를 따뜻하게 했느냐입니다. 남은 생이 비록 짧더라도, 아직 식지 않은 이 온기로 누군가의 첫 불씨가 되길 소망해 봅니다.
2월 첫날, 누군가에게 따뜻한 온기를 전하는 한 달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최고로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