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혹시 정인구 선배님 아니세요?"
쿠키 한 봉지를 든 청년이 내 앞에 서 있었다. 안면이 있는데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머리를 시속 500킬로미터로 돌렸으나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독서모임에서 만났던 정경* 선배였다. 못 알아봐 미안했다.
동네 카페에서 강의안을 마무리하려 들렀다가 우연히 만났다. 휴대폰 번호 등록일이 2022년 8월 15일이었다. 그는 울산으로 직장을 옮겨 독서모임에 참석하지 못했다고 했다. 이곳에 부모님 집이 있는데, 암 투병 중인 어머니 때문에 주말마다 들른다고 했다. 부친은 나보다 한 살 많고, 모친은 아내와 같은 나이였다.
모른 체 외면할 수도 있었는데 인사해 주는 게 고마웠다. 요즘은 책 읽기가 힘들다는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또 조언이 쏟아져 나왔다.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을 필요 없어요. 표지와 목차를 보고 궁금한 질문 세 가지를 뽑아보세요. 독서노트도 두세 줄이라도 좋으니 작성해 보세요. 내용 요약하고 생각도 적어보고. 다른 건 다 포기해도 매일 한 페이지라도 꼭 읽으세요. 365일 읽는 게 중요합니다......,
꼰대의 수다(?)를 쏟아내고 있는 나를 보고 입을 닫았다. 주말 부모님 집에 올 때 한 번씩 만나자며 명함을 건넸다. 그가 아들같이 느껴졌다. 진심을 잘 되길 바랐다.
공저에 함께 참여했던 작가 L에게 전화가 왔다. 글쓰기 코치를 하고 있는 데 강의안 작성에 애를 먹고 있다. 평소 파워포인트를 배운 적도 없다. 그동안 수시로 SOS 긴급 연락이란 제목으로 톡이 온다. 톡을 안 볼 때는 전화가 온다. 오늘은 진짜 급한가 보다. "[긴급] SOS 코치님, 수시로 성가시게 해서 죄송합니다만, 오후 7시에서 8시 사이에 줌으로 좀 가르쳐 주세요." 파워포인트 글꼴 일괄 변경하는 법, PDF 변환해서 카톡으로 보내는 법을 알려드렸다. 감사하다며 아메리카노 커피 쿠폰을 보내왔다. 내가 시간 내어 배워온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한 기능이다.
지난달 글쓰기 수업에 참여한 학인 Y 씨한테서 전화가 왔다. "작가님, 블로그 강의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편한 시간대를 정해 저녁 8시 30분에 줌에서 만났다. 이왕하는 것 단톡방에 공지해서 다른 학인들과 하려다가 집중하지 못할 것 같아 1:1로 강의했다. 블로그 설정부터 편집 방법, PC와 모바일용 대문 이미지 만들기, 크롬 브라우저로 포토앨범 사용하는 법까지. 환하게 웃는 Y 씨의 표정에 내 마음도 따뜻해졌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렇게 기쁠 수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여자는 소녀에서, 아가씨, 아주머니, 할머니가 되지만. 남자는 소년에서 할아버지로 바로 된다고들 한다. 여자에 비해 남자는 나이가 먹어도 철이 안 든다는 내용의 책《오늘 사랑한 것, 림태주》을 읽었다.
당신은 언제 철들래?라는 이야기를 아내에게 자주 듣는다. 술 마시며 방탕하게 살 때, 동료들이 “인구 저거는 환갑 되기 전에 철들기 틀렸다."라며 철없이 구는 나를 보며 말하곤 했다. 철이 없다는 건, 머릿속에 든 게 없다는, 생각이 없다는 말이라 생각한다. 나는 남들보다 못 배웠고, 머리가 텅 비어 있다. 가방끈도 짧다. 젊을 때 술 처마시고 흥청망청 놀았다.
어쩌다 할배!
소년에서 자라기를 멈추었다.
늦게나마 환갑이 지난 나이지만, 철들려고 배우는 걸 쉬지 않는다. 부족한 게 많지만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먼저 알게 된 지식을 알려주려고 애쓴다. 그럴 때마다, 철이 조금씩 드는 것 같다.
"어제 후배 모친상에 다녀왔다. 생의 기록(1943~2025)이다. 죽은 사람은 물결 표시 뒤에 연도가 표시된다. '(1962~ ) ' 나는 아직 물결이 계속 흐르고 있다. 흘러가는 동안 손드는 사람 태워주고, 내려주고, 허우적거리는 사람 뛰어 들어가 구해주며, 계속 흐르고 흐르는 물결이고 싶다.
헤르만 헤세 데미안에서 "새는 알에서 깨어나려고 한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한 개의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한다.
늦게 시작한 배움이지만, 그 배움을 나누는 기쁨을 알게 되었다. 손녀 '정이레'가 알에서 깨어나려고 하고 있다. 다음 달이면 알에서 깨어나나 우리 가정에 찾아온다. 아마도 그 아이에게서 나는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인생은 우리가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매일 새로운 것을 배우고, 성장하고, 나누며 한 개의 세계를 깨뜨리려고 애쓴다. 이것이 바로 우리 모두가 평생 찾아가는 '철듦'의 여정이 아닐까."
어쩌다 할배! 지금 철들고 있는 중입니다!
"오늘도 최고로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