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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는 죽순이다

by 정글

시간은 수확적 단위가 아니라

감수성의 의미론적 분할이다.

-롤랑 바르트

은유 작가《쓰기의 말들》필사.

32번째 이야기, P85



글을 쓰다가 갑자기 멈춘 적이 있는가? 이 글을 써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리는 순간이 있다. 왜 그럴까? 진짜 이야기. 내 치부를 드러내려 할 때가 그렇다.


글쓰기는 죽순과 닮았다. 매일 한 겹 한 겹 자신의 속살을 드러내기 일이다. 독서 또한 마찬가지다. 저자의 이야기에 비추어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 겹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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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다 자신과 만나는 어색한 재미에 빠져 표정이 발그레해진다. 하여, 독서와 글쓰기는 하나다. 작가는 독자에게 자신의 속살을 보여주려 하고, 독자는 저자의 속살을 보고 견주어 자신의 속살을 보기에 그렇다.


여러분이 잘 아는 중국 대나무 묘죽은 씨앗을 심으면 겉으로는 아무런 변화가 없어 보인다. 4~5년 동안 땅속 깊숙이 뿌리만 내린다. 어느 봄날. 땅속에서 나온 죽순은 하루 30~80cm씩 자란다. 6주 만에 15~30미터까지 자라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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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역시 마찬가지다. 글쓰기도 하루아침에 참한 글이 나오지 않는다. 내 글을 보면 답답하고 지루하고 포기하고 싶지만 뿌리에 뿌리를 내리는 시간이 필요하다.


얼마 전 부산 기장 아홉산 숲을 걸었다. 대나무 숲 곳곳에 쑥쑥 솟아오른 죽순을 보며 내 기분도 덩달아 솟아올랐다. 어떤 것은 이미 대나무 형태를 갖추었고, 어떤 것은 땅속에 봉긋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2미터쯤 되는 죽순 앞에 섰다. 반은 옷을 입고, 반은 옷을 벗은 채로 매끄러운 연녹색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죽순의 속살을 조심스럽게 만져보았다. 100일 된 손녀 볼과 손발을 어루만질 때처럼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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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하얀 분이 묻어 나왔다. 내 손바닥도 마음도 촉촉하고 보드라워졌다.

글쓰기도 이와 같다. 누구나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기 꺼린다. 하지만 작가가 치부를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부끄러워진다. 부끄러워지면 질수록 그 글을 읽는 독자의 마음은 촉촉하고 보드라워진다. 작가와 독자가 하나가 되어간다.


나 역시 그랬다. 술 취해 남의 집에 잤던 일, 술집에서 싸우다가 파출소에 끌려간 일, 아내와 별거하고 이혼 직전까지 갔던 일들. 내 치부를 드러내기 힘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에는 책의 분량을 채우기 위해 억지로 써냈다.


지금은 다르다. 내 속에 꼭꼭 감추어 둔 아픈 기억들, 상처들, 괴로웠던 순간들을 지면에 쏟아내면 어느새 껍질을 벗은 대나무처럼 자유로워진다.


글쓰기는 죽순이다. 내 속에 감추어둔 껍질을 하나씩 하나씩 벗겨나가는 과정이다. 얼굴이 발그레해지면 질수록, 부끄러워질수록 내 글은 좋아진다.


"당신의 이야기는 누군가의 희망이 됩니다!"

오늘도 최고로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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