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책 읽으러 바닷가 카페에 갈까?"
오늘은 바람 좋은 날, 마음도 좀 말랑하길래 부산영도 남항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라바스 호텔 28층 카페로 향했다.
하늘에는 듬성듬성 흘러가는 구름들, 바다 위엔 크고 작은 배들이 하얀 물살을 가르고 쉴 새 없이 오고 가고 있다. 카페 밖 야외 테라스로 나왔다. 두 팔을 높이 들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묵혀둔 가슴속 먼지까지 청소해 주는 것 같았다. 가슴이 한 뼘 더 넓어진 기분이었다.
안경을 벗었다. 눈으로 시원한 햇빛을 마시고 코로는 짭짤한 바닷냄새를 들이켰다.
다시 안경을 꼈다. 더 밝아 보였다.
앞으론 자갈치시장과 용두산공원, 그 너머 송도와 롯데백화점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오른쪽엔 부산항터미널과 감만항, 왼쪽엔 남항대교를 따라 펼쳐진 영도 시가지와 푸른 수평선. 뒤로는 봉래산이 마치 하트 모양을 만들어 우리를 내려다본다.
아내는 액션캠을 들고 바삐 움직인다.
"와~ 너무 좋다!" 감탄사를 터뜨리며, 휴대폰 용량이 터질 정도로 찍고 또 찍는다.
아내는 레몬차, 나는 따뜻한 라테를 주문했다. 빵도 3개도 주문, 탁 트인 창가에 앉았다.
그리고 서로 읽을 책 한 권씩 펼쳤다.
“잠깐, 이거지.”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멀리 떠나지 않아도, 복잡한 계획 없이도 이렇게 가슴이 셀렐 수 있다니. 해외여행 아니어도 충분히 설레는 순간.
그런데 문제는. 너무 좋았다는 거다. 햇살은 노곤하고, 책장은 슬로모션처럼 넘어가고, 바다는 은빛 물결로 반짝이고, 배들은 하얀 물살을 가르고 미끄러지고……,
결정적으로 아내가 슬며시 말했다.
“그냥, 우리 자고 갈까?”
그 말에 가슴이 ‘쿵’ 했다. 어라, 이거 설레도 되는 건가? 왠지 모르게 '불륜'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심지어 상대는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내 아내인데 말이다.
퇴직 후 삶은 의외로 바쁘다. 시간은 많은데, 이상하게 여유가 없었다. 무엇을 하든 미리 검색하고, 일정을 짜고, 숙소와 할인쿠폰까지 챙기는 게 습관이 되어있었다. 정작 '쉼'이 뭔지를 잊은 채 살아온 날 들.
그런데 오늘은 아니었다. 아무 준비도 없이, 그저 바다와 풍경에 유혹되어 ‘하룻밤 일탈’을 택했다.
로비에 가서 남은 방중 제일 좋은, 사방이 바다가 보이는 24층 방을 방을 잡았다. 왠지 모르게 ‘도망자’가 된 것처럼 들뜬 기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고,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았다는 자유. 그 자유가 우리를 불륜 커플처럼 만들었다.
인터넷 맛집 검색, '현미해물천국'에서 아귀찜을 시켜 배부르게 먹었다. 먹자마자 호텔 꼭대기에 올라갔다. 석양을 보려 했으나, 그새를 못 참고 해님은 잠자리로 들어가 버리고 배가 지나간 물살처럼 태양빛이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그것도 좋아서 찍고 또 찍었다.
우리는 지금 방에와서 침대에 누워 각자 책을 읽고 있다. 책장을 넘기는 소리, 그리고 바다 위로 번지는 야경.
“이런 날, 자주 만들자.”
내가 말했다.
아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불륜(?)이 이렇게 달콤할 줄이야.'
가끔은 일탈이 필요하다. 가끔은 계획을 접고, 자리를 옮기고, 그대로 머물러 보는 게 삶의 여백을 만든다.
정해진 루틴에서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백수가 과로사한다고 퇴직 후의 삶은 은근히 바쁘다. 시간은 많지만, 정작 ‘쉬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빠듯하게 살아왔다.
그런데 오늘은 다르다. 아무 계획 없이, 충동적으로, 그냥 좋은 경치 하나에 취해 방 하나 잡고 하루를 누리기로 했다.
이건 일탈일까, 아니면 회복일까? 솔직히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이 충동이 내 삶에 필요한 것이었다는 것.
우리는 지금 ‘불륜’ 중이다. 일상과의 불륜, 계획과의 불륜, 습관과의 불륜. 그리고 그 상대는 내 아내다. 얼마나 안전하고, 얼마나 짜릿한 조합인지.
오늘 하루, 우리는 책을 읽으려다, 바다를 훔치고 눌러앉았다. 저녁을 먹고 남은 시간. 야경을 볼까? 뭘 할까
서로에게 조용히 묻는다.
“그냥… 내일도 자고 갈까?”
나에게 일어나는 일은 누군가에게 반드시 일어난다면, 오늘 같은 달콤한 일탈도 당신과 함께 하면 좋겠다.
'오늘'에 모든 인생이 담겨있다. 인생은 힘든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늘 같은 날도 있으니 말이다. 진짜 불륜은 일상과 하는 게 아닐까.
아침. 부산 남항 일출을 보려 하니 우리 일탈을 못 보겠는지 태양마저 안갯속에 숨어 나오질 않는다.
"어서 빨리 나와, 너도 어제 다른 데서 자고 왔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