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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밀크티 향이 나요.

by 정글

상투성은 문장에서 발휘되면 민망하지만

주제가 되면 핵심 요소로 변화한다.

존 플랭클린

은유.《쓰기의 말들》. 필사. 65.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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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 작가는 삼성 직업병 문제 해결을 위한

농성장 장면을 쓸 때 관용구가 아닌

'본 장면을 쓰기로 했다'는 게

오늘 필사 글의 주제다.


"상투적인 글이 아닌 본 자로서

그냥 거기에 간 이유와

본 장면을 쓰자 했다."라고.


존 플랭클린 역시

"상투적은 문장에서 발휘되면 민망하지만

주제가 되면 핵심 요소로 변화한다."라고 말한다.


자이언트 북컨설팅 이은대 작가는

강의 때마다 항상 하는 말이 있다.

"제발 공자님 말씀 쓰고 말고

내 경험을 쓰라고." 핏대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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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토요일 오전 아홉 시

독서모임을 마치고 인근 카페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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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명이 둘러앉았다.

"난 따뜻한 카페라테"

내 앞 테이블에 앉아 있는

K 선배는 밀크티를 시켰다.


S 선배는 테이블마다 다니며

주문 내역을 필기한 후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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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책에 나올 듯한 연한 풀잎 드레스를

입은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주인은

분주하게 주방을 오고 갔다.

야채를 가는 기계가 요란하게 들리고

테이블마다 이야기 소리가

커피 향과 함께 카페 안으로 퍼졌다.


카페라테가 나왔다. 후후 불며 한 모금 마셨다.

감칠듯한 텁텁 달콤한 맛이

목으로 넘어가는 감촉이 부드러웠다.


"K 선배님, 선배님은

예전에는 진한 아메리카노 커피 같았는데,

지금은 밀크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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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선배는 꽃무늬 레이스가 있는 밀짚모자를 썼다.

검은 테 둥근 안경을 끼고 있다.

안경 속에는 흑진주 같은 눈망울을 반짝였다.


밀크티를 한 모금 마시고 K 선배가 말했다.

"역시 작가님은 말씀도 시적으로 하시네요."


K 선배는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누구보다도 열정적이고 똑 부러졌다.

아이디어가 통통 튀었고 눈을 크게 뜰 때면

눈알이 튀어나올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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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그녀는 뇌출혈로 쓰러져

대학병원에 실려갔다.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났다고 했다.

모두가 회복하기 힘들 거라고 했지만

힘든 상황을 견디고 이겨냈다.

병원에서도 기적이라고 했단다.

그랬던 그녀가 내 앞에서 웃고 있다.


그녀는 정말 진한 아메리카노 같았는데

밀크티같이 부드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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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서 눈을 떴을 때 팔다리가 묶여

있어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는데,

간호사들이 인수인계를 하는 목소리가

다 들려 불안했다"라고 했다.


"저 환자 약 두 통밖에 없어,

열을 내리느라 너무 많이 썼어."

"저 환자 회복하기 힘들 거라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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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가래가 목에 차서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데 말이 안 나왔다고 했다.

간호사를 부르려고 침대를 손으로 치는 데

손에 힘이 없어 아무리 두드려도

소리가 안 났다고......,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구나.

모든 걸 내려놓는 연습을 했다"라고 했다.

"죽은 목숨 덤으로 사는 거라 생각하니

겁이 없고 매사에 용기가 생긴다고,

욕심이 없어지고 모든 게 감사하다."라고 했다.


그녀의 표정은 100일 된 우리

손녀가 웃는 모습 같았다.


그날 카페에서, 밀크티를 마시며 웃던

K 선배의 모습이 자꾸 떠오른다.


똑 부러진 야무진 사람이었는데,

삶이 그녀를 한 번 꺾고 나니

더 깊어지고 부드러워졌다.



어쩌면 사람도 차처럼, 뜨겁게 우리고 식히는

시간을 지나야 비로소 향이

살아나는 건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어떤 맛일까.

'아메리카노처럼 쓰고 강한가,

아니면 밀크티처럼 부드럽고 단단한가.'


글을 쓰는 이유는,

누군가를 평가하려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서다.


그녀처럼, 나도 언젠가 누군가 앞에서

조용히 웃으며 말하고 싶다.


“지금 이 삶, 덤으로 사는 거라서,

그래서 더 고맙고 용기 난다고.”


큰일을 겪지 않고 지혜를 얻어 감사한 아침이다.


오늘도 최고로 행복하세요!!

당신의 이야기는 누군가의 희망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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