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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서 우러난 언어의 힘

by 정글


언어는 시인과 노동자의 합작품이

되어야 한다.

-조지 오웰.

은유. 《쓰기의 말들》. 필사. 76.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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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아내와 함께 포항에 사는 팔순이 넘은 처형 집을 방문했다. 처형은 25평 아파트에서 혼자 생활한다. 베란다에는 온갖 수목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방 안 어항에서는 열대어들이 수초 사이로 펄떡이며 생기가 있었다. 수목과 물고기의 생기 있는 모습을 보며 처형의 삶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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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오는 길 냉장고에서 물김치 한 통을 꺼내 아내에게 건네며 말했다. “정서방 물김치 좋아하잖아. 하루 밖에 두었다가 냉장고에 넣어. 사는 것도 김치처럼 삭아야 제맛이더라. 삭은 거 먹으면 속이 뻥 뚫려.” 장모님이 안 계신 후에도 늘 사위처럼 대해주는 처형의 따뜻한 마음이, 그 한마디에 담겨 있었다. 처형은 물김치에 삶을 담그고, 나는 그 물김치에 마음을 적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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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필사한 본문 내용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싸움에 참여한 주민 인터뷰집 《밀양을 살다》에서 김영자 어르신은 한평생 농부로 고된 농사일을 하면서도 허리가 아프지 않았고, 밀가루 음식도 거뜬히 소화했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옛날에는 내 위장도 미제고 내 허리도 미제인 줄 알았어. 우리 클 때는 미제가 제일 좋았거든요." 이 얼마나 탁월한 은유인가. 고된 노동 속에서도 꺾이지 않은 자부심과 유쾌함이 그 한마디에 녹아 있다. 어르신의 언어는 땅을 딛고 땀을 흘린 삶에서 우러나, 허공에 뜬 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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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최은영 《밝은 밤》 책 독서토론을 했다. 책에서 지연이가 할머니에게 증조할머니의 삶의 이야기를 들으며 떠올린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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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라는 것이 꺼내볼 수 있는 몸속 장기라면, 가끔 가슴에 손을 넣어 꺼내서 따뜻한 물로 씻어주고 싶었다. 깨끗하게 씻어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해가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널어주고 싶었다.”


이 문장은 지연의 상처와 슬픔을 어루만지는 동시에, 내 마음의 무거움도 덜어주었다. 삶의 고통을 이렇게 섬세하고도 시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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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내가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모두 시인이다. 처형의 물김치에 담긴 삶의 비유, 《밀양을 살다》의 어르신 농사일의 언어, 소설 《밝은 밤》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백 년을 이어온 여성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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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의지나 노력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언어의 힘으로 살아가는 거라는 생각이 든다. 서로가 서로에게 시인이 되어.


"당신의 이야기가 누군가의 희망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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