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영 작가의 첫 장편소설 《밝은 밤》은 한 여성의 상처와 회복을 따라가는 개인적인 이야기인 동시에, 증조모-할머니-엄마-그리고 '나'로 이어지는 4대의 삶을 통해 한국 근현대사의 아픔을 따뜻하게 보듬는 가족소설입니다. 한 여성이 자신의 상처를 마주하며, 자신을 찾아가는 잔잔하고 따뜻한 여정을 담고 있습니다.
이 책은 총 5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부는 주인공 '나'(지연)가 이혼의 아픔을 안고 어린 시절의 도시 '희령'으로 내려가, 20년 넘게 교류가 없던 할머니와 재회하는 것으로 이야기의 문을 엽니다.
2부에서는 할머니와의 관계가 서서히 깊어지며, '나'는 할머니로부터 증조할머니 '삼천'과 그녀의 유일한 친구였던 '새비'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처음 듣게 됩니다.
3부는 소설의 가장 빛나는 축으로, 백정의 딸로 태어나 시대의 멸시 속에서도 존엄을 잃지 않았던 증조할머니의 강인한 삶과 새비 아주머니와의 특별한 우정을 집중적으로 그려냅니다.
4부에서는 다시 현재로 돌아와, 암 재발로 병원 생활을 하는 엄마와 '나'의 갈등을 통해 할머니와 엄마 사이의 오랜 상처와 오해의 골을 엿보게 합니다.
마지막 5부에서는 모든 인물의 이야기가 하나로 모이며, '나'와 할머니, 그리고 엄마의 관계가 조심스럽게 회복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깊은 여운과 함께 마무리됩니다.
주인공 '나'(지연)는 남편의 외도로 깊은 상처를 입고 서울을 떠나 할머니가 사는 바닷가 도시 '희령'으로 이주합니다. 그곳에서 20년 넘게 만나지 못했던 할머니와 재회합니다. 그곳에서 할머니가 들려주는 증조모 '삼천'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과 가족의 뿌리를 알아갑니다. 백정의 딸이라는 이유로 평생을 차별과 멸시 속에서 살아야 했던 증조모의 삶, 그리고 그녀의 유일한 벗이었던 '새비 아주머니'와의 우정은 소설 중심축을 이룹니다.
작가는 역사적 비극과 사회 편견 속에서 신음했던 여성들의 삶을 묵직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등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은 인물들의 삶을 더 힘들게 합니다. 소설은 힘든 삶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과 사랑, 그리고 연대의 힘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합니다.
특히 증조모와 새비, 할머니와 명숙, 그리고 나와 할머니로 이어지는 여성들의 관계는 서로에게 가장 깊은 상처의 증인이자 가장 따뜻한 위로자가 되어주며, 혈연을 넘어선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되묻게 합니다.
소설을 읽는 동안 내 주위에 '새비 아주머니'같은 분이 있는지 생각해 봤습니다.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자기 일처럼 뛰어와 줄 사람'이 없다는 데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내가 세상을 잘 못 살았나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족보다 끈끈한 정으로 죽음의 고비를 넘나드는 증조할머니와 새비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읽으며 마음이 몽글몽글했습니다. 그러다가 내 주변에 그녀같은 사람이 없어 씁쓸했습니다. 하여, 내 주위에 그런 따뜻한 사람이 없으니 내가 그런 사람이 되겠다는 욕심을 부려보기도 했습니다.
나는 학교에 들어갔고 한글과 숫자를 배웠고 시계를 읽는 법을 배웠고 죽은 사람은 결코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사실을, 거기에 있으면서 동시에 여기에 존재할 수는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배웠다." (P. 171)
위 문장처럼, 소설은 담담한 문체 속에 삶의 근원적인 슬픔과 진실을 담아냅니다. 마음이라는 것이 꺼내볼 수 있는 몸속 장기라면, 가끔 가슴에 손을 넣어 꺼내서 따뜻한 물로 씻어주고 싶었다. 깨끗하게 씻어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해가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널어놓고 싶었다.(P. 14)는 표현으로 자신의 고통을 직시하고 서로의 아픔을 보듬습니다. 저는 이 문장을 읽다가 한참을 멈췄습니다. 어쩌면 이토록 아름다운 문장을 만들 수 있을까? 하고.
《밝은 밤》은 과거와 현재, 세대를 넘나드는 여성들의 삶을 통해 보편적인 공감과 깊은 울림을 제공합니다. 여성이 존중받지 못하고 핍박하던 시대 속에서 자신을 지키려 했던 증조할머니의 강인함, 다른 사람 아픔을 온 맘 다해 보듬었던 새비 아주머니의 따뜻한 마음,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상처를 치유해 나가는 '나'의 모습까지 농밀하게 그려냅니다.
196회 부산큰솔나비 독서포럼에서 책을 토론하는데 남자 4명이 모두 울었다고 했습니다. 대부분 돌아가신 어머니, 할머니가 생각나서. 살아있지만 가족이 생각나서. 저도 카페에서 책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려 창피했습니다. 안경 사이로 눈물을 몰래 닦다가 화장실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토론 중 급 공감, 서로 손뼉 치며 웃었습니다.
소설은 탄탄하게 구성되어 지루하지 않습니다. 중간중간 굵직한 사건을 등장시켜 독자로 하여금 몰입하게 만듭니다. 예를 들어 새비 아저씨의 갑작스러운 일본행, 음주운전자에 의한 주인공 교통사고, 한국 전쟁으로 북한군에 의해 사상범으로 처형되는 동네 사람들. 히로시마 원폭으로 죽은 줄 알았던 새비 아저씨의 귀환 등.
책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더욱 개인화된 요즘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진정한 관계'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핏줄로 엮이지 않았음에도 서로에게 온전한 마음을 내어준 증조모와 새비의 우정, 그리고 이혼 후 혼자가 된 '나'가 할머니와의 대화를 통해 위로받는 과정은, 우리에게 사랑과 연대가 어떻게 한 사람을 구원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이 책은 훌륭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을 꼽자면 일부 인물들의 서사가 충분히 다뤄지지 않아 독자의 상상에 맡겨야 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엄마가 할머니와 왜 멀어졌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끝까지 명확하게 드러나기보다는 암시만 남겨두어 아쉬움이 남습니다. 언니의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작가의 의도였을 수 있으므로, 단점으로 치부하기보다는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하는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최은영 작가의《밝은 밤》은 시대를 초월한 여성들의 연대와 사랑을 다룬 책입니다. 책 제목이 '어두운 밤'이 아니라 '밝은 밤'입니다. 어두운 현실 속에서도 밝은 빛을 찾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밤을 밝게 만듭니다.
출처 : 동아일보
작가는 이 책을 통해, 삶의 힘겨운 시간을 지나온 여성들이 서로를 보듬고,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며, 마침내 스스로의 삶을 찾아가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그려냅니다. 상처받은 모든 이들에게 "바보야, 난 널 떠난 적 없어"(P. 235)라고 속삭이는 듯한 따뜻한 위로를 건넵니다. 관계의 소중함을 잊고 살아가거나, 삶의 무게에 짓눌려 있는 모든 독자에게 이 책을 읽기를 권합니다. 읽는 내내 당신의 마음속 한구석에 꺼지지 않는 따스한 불빛 하나를 밝혀줄 것을 보장합니다.
[책 속 문장 여행]
1부
P. 14. 마음이라는 것이 꺼내볼 수 있는 몸속 장기라면, 가끔 가슴에 손을 넣어 꺼내서 따뜻한 물로 씻어주고 싶었다. 깨끗하게 씻어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해가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널어놓고 싶었다.
P. 18. 어떤 말은 듣는 순간 영원히 잊히지 않으리라는 걸 알게 한다. 내게는 엄마의 그 말이 그랬다.
P. 34. 기래, 가라. 내레 다음 생에선 네 딸로 태어날 테니. 네 딸로 다시 태어나서 에미일 때 못다 해준 걸 마저 해줄 테니. 그때 만나자. 그때 다시 만나자.
P. 42. 그녀는 살고 싶었다. 걷고 싶으면 걷고, 노래 부르고 싶으면 노래 부르고, 웃고 싶으면 웃고, 울고 싶으면 펑펑 울고 싶었다. 백정의 표지 따위는 집어던져버리고 세상을 보고 싶었다.
P. 55. 그녀에게는 그런 재능이 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속이지 않는 재능. 부당한 일은 부당한 일로, 슬픈 일은 슬픈 일로, 외로운 마음은 외로운 마음으로 느끼는 재능.
2부
P. 85. 엄마는 내가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라고 말했다. 노후가 보장된 부모에 착한 남편,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수 있는 특권을 가졌다고 이야기했다. 그 말은 맞았다. 그것만으로도 내 삶의 복은 차고 넘쳤다.
P. 99. 아직도 내 마음의 일부는 그와 함께했던 시간을 그리워하고 있구나, 오로지 그만이 내게 줄 수 있었던 친밀함을 갈구하고 있구나, 그 편안함과 안락함을 기억하고 있구나.
P. 104. 나는 오랜 시간 혼자 살아온 할머니를 생각했다. 경로당에 다니고, 밭에 나가 일하고, 친구들을 사귀며 지내는 할머니. 할머니는 외롭지 않을까. 할머니는 대체 누구에게 의지하고 사는 걸까.
P. 116. "새비 아주머니를 만나 아픈 일이 많았는데도, 새비 아주머니를 기억하는 엄마의 표정은 늘 환했어. 꼭 다른 세상에 있는 사람처럼 말이야. 새비 아주머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런 상처 같은 거 받지 않아도 됐겠지만 그래도 엄마는......" "새비 아주머니를 만나는 삶을 택하셨겠네요." "그래. 그게 우리 엄마야."
P. 130. 우리는 둥글고 푸른 배를 타고 컴컴한 바다를 떠돌다 대부분 백 년도 되지 않아 떠나야 한다. 그래서 어디로 가나. 나는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3부
P. 155. 예전의 나는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겨울보다는 봄에, 봄보다는 여름에 더 좋아질 거라고 믿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P. 168. 세상에는 끝나는 것들만 있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너를 보니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겠더라.
P. 171. 나는 학교에 들어갔고 한글과 숫자를 배웠고 시계를 읽는 법을 배웠고 죽은 사람은 결코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사실을, 거기에 있으면서 동시에 여기에 존재할 수는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배웠다.
P. 199. 함께 웃고 즐거워하고 따뜻함을 나누는 시간을 그대로 누리지 못하고 불안에 떨었던 것 말이다.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일이 세상에는 있었으니까. 아무리 불안에 떤다고 해도, 좋은 순간을 그대로 누리지 않으려 해도 피할 수 없는 일들이 있었으니까.
P. 235. 바보야, 난 널 떠난 적 없어.
4부
P. 245. "얼굴만 그런 게 아니라 눈빛이랑 표정도 그래. 그리고 누가 널 짓밟으려고 해도 밟히지 않으려고 할 거야. 그래서 괴롭지. 안 그러냐?"
P. 251. "알아. 잘 알고 있어. 그냥, 그럴 때가 있었다는 거야. 마음이 나에게 박하게 기울 때가 있었어. 그래도 지연이 너한테 고마워." "제가 뭘요......" "내 얘기 들어줘서. 들어줘서 정말로 고마워."
P. 252.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세상에는 진심으로 사과받지 못한 사람들의 나라가 있을 것이다.
P. 261. 그런데도 언니, 이게 다 무슨 소용이지 싶을 때가 있어. 배부른 소리라는 거 알아. 나랑 같은 방을 쓰는 선배 언니는 자기도 그랬다면서 시간이 지나면 적응될 거라고 이야기하더라. 그런데도 자꾸 어마이 생각이 나.
P. 271. 엄마는 평범하게 사는 것이 제일 좋은 삶이라고 말했었다. 나는 머릿속에 동그라미 하나를 그리고 그 안에 평범이라는 단어를 적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삶, 두드러지지 않은 삶, 눈에 띄지 않는 삶, 그래서 어떤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고, 평가나 단죄를 받지 않고 따돌림을 당하지 않아도 되는 삶. 그 동그라미가 아무리 좁고 괴롭더라도 그곳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 엄마의 믿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잠든 엄마의 숨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5부
P. 301. 걸음을 떼기 시작할 때부터 자신이 어디를 가든 그림자처럼 쫓아오던 희자의 모습을 할머니는 기억했다. 쉴새없이 재잘거리고 작은 기억 하나라도 잊을까 봐 전전긍긍하며 자신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던 어린 희자의 모습을 기억했다.
P. 313. ‘맞서다 두 대, 세 대 맞을 거, 이기지도 못할 거, 그냥 한 대 맞고 끝내면 되는 거야.’ 나는 그 말을 하던 엄마의 얼굴을 떠올렸다. ‘지는 게 이기는 거다.’
P. 316. "그래, 똥강아지. 걔가 얼마나 감탄을 잘했는지 몰라. 작은 개구리 하나를 봐도 우와, 커다란 소라 껍데기를 봐도 우와, 늘 우와, 우와, 하는 거야. 그런데 그건 너도 그렇더라. 언니를 보고 커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어쩌면 우리 엄마로부터 이어졌는지도 몰라.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그렇게 감탄을 잘하니 앞으로 벌어질 인생을 얼마나 풍요롭게 받아들일까 싶었어. 좋은 일이 생길 때마다 우와, 하면서 살아가겠구나. 그게 나의 희망이었던 것 같아."
P. 333. 영옥이 언니는 항상 그랬어요. 혼자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우리가 너의 가족이라고. 언니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던 건 아니에요.
P. 337. 내가 지금의 나이면서 세 살의 나이기도 하고, 열일곱 살의 나이기도 하다는 것도. 내게서 버려진 내가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사실도. 그 애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관심을 바라면서, 누구도 아닌 나에게 위로받기를 원하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글센티브 책쓰기 VIP 27기 과정에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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