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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는 바보다. 아무것도 모른다.

by 정글


상대방이 내 말을 쉽게 이해할 것이라고

착각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글쓰기는 시작되어야 한다.

-김대중


은유.《쓰기의 말들》. 필사. 78. 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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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3학년 수준으로 쓰세요"


글공부 선생님이 수시로 하는 말이다. 글은 탁 보면 바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독자가 해석하지 못하는 글은 외면당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쇼츠 영상도 1초를 보지 않고 넘기는 세상인데 하물며 글이랴!


'힘들었다, 좋았다, 나빴다, 불행하다, 힘들었다, 괴로웠다. 슬펐다, 짜증 났다, 행복했다,......' 초보 작가들이 이런 표현을 자주 쓴다. '퉁치는 표현'이라 한다. 설명하는 글이다. 독자가 뭐 때문에 힘들었는지, 좋은지, 나쁜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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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초등학교 3학년이 이해할 수 있게, 독자가 외면당하지 않는 글을 쓸 수 있을까? 설명하지 말고 내 경험을 보여주는 글을 쓰면 된다.


예를 들면,

퉁치는 표현 : 오늘 데이트가 정말 좋았다.

보여주는 글 : 카페 문을 열고 나오는데 그가 내 손을 잡는다. 따뜻하다. 걷다가 강아지를 보며 함께 웃는다. 그의 웃음소리가 내 귀를 간질거린다. 공원 벤치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는다. 바닐라가 입술에 묻었나 보다. 그가 손수건으로 살짝 닦아준다. 얼굴이 뜨거워진다. 집 앞에서 헤어질 때까지 시간이 너무 빨리 간다. 휴대폰을 보니 벌써 밤 10시. 하루가 5분처럼 느껴진다.


퉁치는 표현 :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슬펐다.

보여주는 글 : 병원 복도에 선 채로 의사의 말을 듣는다. '오전 6시 20분에 평안히 가셨습니다.' 다리에 힘이 빠진다. 벽에 기댄다. 병실로 들어간다. 할머니가 하얀 이불을 덮고 누워 있다. 평소보다 얼굴이 작아 보인다. 손을 잡는다. 차갑다. 어제까지만 해도 따뜻했는데. '할머니' 하고 불러본다. 대답이 없다. 당연한데 왜 계속 부르게 될까. 눈물이 뚝 떨어진다. 할머니 손등에 떨어진 눈물을 휴지로 닦는다."


퉁치는 표현: 이혼 후 불행했다.

보여주는 글: 혼자 먹는 저녁이 이렇게 조용할 줄 몰랐다. 수저 소리만 식탁에 울린다. 텔레비전을 켜 놓지만 소리만 들린다. 화면은 보지 않는다. 설거지할 그릇이 하나뿐이다. 예전엔 늘 두 개였는데. 싱크대가 너무 넓어 보인다. 밤 9시가 되면 할 일이 없다. 책을 읽으려 해도 집중이 안 된다. 같은 문장을 세 번 읽는다. 침대가 반쪽만 차 있다. 베개도 하나만 있으면 된다. 나머지 하나는 옷장에 넣어뒀다. 주말이 가장 길다. 48시간이 일주일처럼 느껴진다.


퉁치는 표현: 빚 때문에 괴로웠다.

보여주는 글: 통장 잔고를 확인한다. 12만 원. 카드 대금 결제일까지 사흘 남았다. 120만 원을 어떻게 마련하지. 휴대폰이 울린다. 또 다른 카드회사다. 전화를 받지 않는다. 하루에 대출회사 전화가 일곱 통씩 온다. 친구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말할까 하다가 참는다. 이미 두 달 전에 50만 원을 빌렸다. 아직 갚지도 못했는데. 밤 12시가 넘어서야 잠든다. 새벽 4시에 깬다. 다시 잠들지 못한다. 천장을 바라보며 계산만 한다. 월급 180만 원에서 생활비 빼면 얼마가 남을까."


퉁치는 표현: 직장 상사에게 질책당해 종일 힘들었다.

보여주는 글: 토, 일요일 사무실 출근, 보고서 작성했다. 월요일 오전 7시 출근했다. 과장 책상위에 보고서를 올려두었다. 9시 과장 출근. 나를 불러 과장 책상앞으로 갔다. 과장이 내 보고 얼굴을 향해 던졌다. "이게 뭐야? 초등학생이 쓴 것도 아니고?'" 목소리가 사무실에 울려 퍼졌다. 동료들이 일제히 일어나 나를 본다. 얼굴이 뜨거워진다.

흩어진 서류를 주워 담는다. A4 모서리에 손이 삐었다. 따갑다. 손이 떨린다. 자리에 앉지만 모니터 화면이 보이지 않는다. 목이 마르다. 물컵이 비어 있지만 정수기까지 가려면 과장 옆을 지나야 한다. 그냥 참는다.

점심시간에도 자리를 뜨지 않는다.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사서 책상에서 먹는다. 맛이 없다.

퇴근길 엘리베이터에서 과장과 마주친다. 구석에 서서 바닥만 쳐다본다. 1층까지 30초가 30분처럼 길다. 집에 와서도 그 목소리가 귓속에 맴돈다. '이게 뭐야?' 침대에 누워도 잠이 안 온다. 새벽 2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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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olPubilcDomains, 출처 OGQ

독자는 아무것도 모른다. 내가 알고 있으니 상대방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금물이다. '퉁치는 표현'이 아닌 조근조근 이야기하듯 내 경험을 보여주는 글을 쓰면 더 많은 독자를 아우를 수 있다.


"상대방이 내 말을 쉽게 이해할 것이라고 착각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글쓰기는 시작되어야 한다."라는 김대중 님의 말을 가슴에 품고 하루를 시작한다.


오늘도 최고로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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