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르게 변화하는 무서운 세상을 버티는 나의 마음가짐.
예전에는 어땠더라. 그러니까 장래희망 같은 것이 있던 어린 시절 말이다.
그땐 사회적인 지위나 명예가 장래 희망에 녹아 있었던 것 같다. 똘망하게 꿈꾸던 어린 시절을 지나서 나는 삼십 대 중반에 회사에서 은퇴한 사람이 되어 있다. 삶에 부대끼면서, 억지로 삶을 버텨내면서, 그런 꿈들은 점점 현실성이 없어졌다. 땅에서 떨어져 나가 붕 뜬 풍선처럼 조금씩 멀어져 저 하늘에 올라가 버린 것이다.
그 대신에 내 마음에는 방어적이고 소소한 소망들이 자리 잡았다. 무언가를 억지로 하지 않고, 누군가가 터치하지 않는 평온한 하루. 꾸준한 운동과 건강. 내가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단정한 집. 그 소망은 회사를 은퇴하면서 어느 정도 실현되었다.
나 자신에 대한 평가도 상당히 시니컬하다. 착한 사람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생각은 없다. 인간은 이성적이지 않고, 자기 생존을 위한 이기심은 기본값이라 여기는 탓이다. 다만, 사회를 살아가는 구성원으로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며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은퇴했기에, 아직 할 수 있는 일이 많다고 생각은 하지만, 사회에 기여하는 측면에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큰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던 과거에도 사회에 기여했다는 생각은 그다지 없었다.
그렇다. 한마디로 나는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인 상태로 조용하게 살고 싶다.
현재의 나의 인생관은 행복을 추구하기보다, 하나의 고통이라도 더 제거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보는 쇼펜하우어의 사상과 상당히 비슷하다. 사실 쇼펜하우어는 가족과도 연대하지 못하고, 사회적으로도 고립된 외로운 사람에 가까웠다고 한다. 그런 그의 사상이 200여 년 후에 한국에서 수많은 책들로 번역되어 널리 읽히고 있다니, 제로 상태를 추구하는 것이 나만은 아닌가 보다.
뭐든지 빠르게 바뀌고, 넘쳐나는 과잉의 시대에서 나는 최소한 나 자신은 지키고 싶다. 만약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린다 해도, 나 자신만 온전히 남기면 다음에 그 씨앗을 심어 다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아직 살아가야 할 날들이 더 많은 나이기에 지금은 은퇴 상태는 사실 영원하지 않을 것이다. 내 주변의 상황들이 어떻게 바뀔지 알 수는 없지만 나 자신을 말썽 없이 잘 지켜 조용히 가만히 풀어놓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