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계단에 한 발을 올려놓자 이제야 이곳에 왔었다는 사실이 피부로 느껴진다.
그래 맞아, 이 계단. 이제 기억나네.
난 엉거주춤 한 발만 올려놓은 상태에서 벗어나며 어렵사리 그때의 기억을 끄집어낸다.
아주.. 까마득하다. 잘 기억나진 않지만 아마 5살 때였을 거다.
아버지는 설악산을 무척 좋아하셨다. 그렇게 어린아이를 데리고 악소리 난다는 산을 어떻게 올랐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린 해냈었다, 정말 신기하게도.
그때의 아버지는 많이 들떠있었다. 평소 잘 웃지 않는 아버지가 싱글벙글 웃으며 날다람쥐 같이 산을 올라가는 탓에 힘들다 울음을 터뜨리며 떼를 썼던 기억이 난다.
흔들바위에 도착해서 잠깐 숨을 돌릴 때였다.
“태완아, 자연은 기다려 주지 않아. 그러니까 볼 수 있을 때 많이 보고 그 순간을 잘 느껴야 해.”
그때는 그 말이 이해가 안 됐다. 그리고 사실 지금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자연은 보통 변하지 않음의 상징이 아닌가. 사람들이 자연을 좋아하는 이유는 매번 가고 또 가도 그 자리에 있기 때문 아닌가.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치여 있다가도 우직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자연을 보며 위로를 얻는 것 아니었나. 그런데 왜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을까.
여기까지 생각하자 계단이 끊어진다. 잠깐 평지가 나오고 또 계단이 이어진다.
그때 아버지와 찍었던 사진이 생각난다. 눈시울이 붉어지는 게 느껴진다.
아, 다 운 줄 알았는데.
나는 조용히 흐르는 눈물을 그대로 둔다.
우린 흔들바위 앞에서 아버지가 어렵게 빌린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다. 그걸 빌리느라 농작물을 몇 박스를 갖다 줬다더라.
아버지는 그 사진을 인쇄해 액자에 소중히 담아두었다. 그 뒤로 나는 그 사진의 존재에 대해 완전히 잊어버렸다. 여기 왔었다는 사실조차도.
그러다 최근에 미뤄뒀던 아버지 유품을 정리하다 그 액자를 찾았다. 액자는 아버지 방 책상 구석에 놓여 있었다.
그 방에 들어간 지도 오래됐을 뿐만 아니라, 본가를 방문할 때도 매번 거실에서만 아버지를 봤던 탓에 거기 있던 액자를 미처 보지 못했다. 자주 열심히 닦았는지 액자는 먼지 한 톨 쌓이지 않은 채로 깨끗했다.
아버지는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렇게 웃는 건 아마 그때 이후로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웃을 일이 없었던 걸까. 아니면 내가 관심이 없었던 걸까.
차디찬 공기에 눈물이 식어 얼굴이 춥다. 장갑으로 대충 쓱쓱 닦아 내며 계단을 따라 코너를 돈다.
그리고 아버지 옷장에서 발견된 작은 상자. 어디서 구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따뜻한 자줏빛 포장지가 감싸진 꽤나 고급스러워 보이는 상자였다. 아버지가 평소 아끼던 것들을 넣어놓던 상자 같았다. 그 안에는 ‘동글’이 있었다.
흔들바위를 둘이 처음 방문하던 날, 하산하던 길에 아버지는 마음에 드는 돌을 하나 골라보라 하셨다. 그때만 해도 국립공원에서 돌멩이를 주워가면 안 된다는 걸 많은 사람들이 모르기도 했고, 딱히 제재도 없었다.
나는 하산 내내 주위를 둘러보며 고민을 했다. 손바닥 안에 딱 들어오는 크기면서 표면이 매끄러워 쥐었을 때 아프지 않아야 했다. 그러면서 무늬가 독특하고 색도 예뻤으면 좋겠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하산 길이 끝나갈 때쯤, 계곡 근처에서 드디어 데려갈 돌을 발견했다.
흰색과 검은색이 적절하게 섞여 예쁜 무늬를 만들어내고 있었고, 가벼웠지만 그렇다고 크기가 아주 작지도 않았다. 부드럽고 윤이 나는 표면과 바닥에 있는 큰 점이 유독 마음에 들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이걸로 하겠다고 말하며 이름을 ‘동글’로 짓고 싶다고 했다. 단순히 그저 동그랗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가끔 나에게 ‘우리 동글이’라고 했기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말이기도 했다. 어린 내가 발음하기도 편했다.
“그래 좋아, 동글이로 하자. 이제 동글이는 우리 식구가 되는 거야.”
그렇게 말하며 시원하게 웃던 아버지가 떠올라 눈앞이 또 흐려진다. 나는 한 달 정도 그걸 애지중지하다가 점점 관심이 식었고, 결국엔 잊어버렸다. 그런데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동글이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계셨다.
아버지, 아버지..
그 말이 나오지 못하고 입안을 맴돈다.
이젠 그 이름을 들을 사람이 없다.
앞으로 이 산에 나는 혼자 올 수밖에 없다.
아니, 이 세상에 난 철저히 혼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