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00'의 시대(8)

부재, 수용

by 향연

그는 눈을 정신없이 헤치고 내려가기 시작한다.


'그럴 리가 없어. 어떻게 그 큰 바위가 갑자기 사라질 수 있겠어. 내가 잘못 본 게 아닐까.'


그러다 그만 발이 미끄러진다. 이미 난 발자국 위로 발을 겹쳤어야 했는데. 급하게 내려오다 보니 아무 데나 정신없이 디딘 탓이다. 두 손으로 간신히 지지해 다행히 절벽 아래로 떨어지진 않았다.


식은땀이 쭉 등골을 타고 흐른다. 진짜 큰일 날 뻔했다. 돌에 부딪힌 엉덩이가 찌르르 아파온다. 정신이 번쩍 든다.

'아니, 내 눈으로 똑똑히 봤잖아. 정말 없었다고. 분명 흔들바위가 있던 자리가 맞는데 아무것도 없었어.'


그는 주저앉은 채로 한참을 고민한다. 자신도 모르게 한쪽 손은 주머니 속 ‘동글’을 만지고 있다.



‘다시 가 봐.’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마치 동글이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그 말에 그는 조금 놀란다. 그리고 이내 망설인다.


‘다시 가보는 게 도움이 될까?’


그는 동글을 꺼내 바라본다. 동글은 말이 없다. 그러나 동글을 마주하는 그 잠깐의 시간 동안 그는 답을 얻는다.


‘그래, 가자. 흔들바위가 있든 없든 다시 가서 제대로 마주하자.’


그는 왠지 모르게 그런 용기가 생긴다. 의지에 찬 그는 눈을 훌훌 털고 일어나 왔던 길을 다시 오른다. 이번엔 자신의 발자국 위에 다시 발을 겹친다.



다시 도착한 그곳.


흔들바위는 여전히, 그 자리에 없다.


그러나 그는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는다.


흔들바위가 있던 자리에 약간의 환영같은 무언가가 있다.


흔들바위가 보인다는 게 아니라 그게 있던 자리 주변으로 어떤 희미한 테두리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는 거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바위는 아니지만 거기 무언가가 여전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실물도 아니고, 완전한 무도 아닌 그 사이의 어떤 것, 그것이 묵직하게 그곳에 눌려있는 느낌.

그리고 그것과 자신 사이의 거리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그것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는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나는 걸 알아차리고 놀란다. 본인 스스로도 그 이유가 납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뭔지도 모르는 그것을 보고 가슴이 뜨거워진다. 그러나 더 놀라운 건, 왜인지 익숙하고 애틋하다. 그의 손은 자연스럽게 호주머니 속에 들어가 있다.


차가운 바람이 분다.


그는 동글과 함께 흔들바위가 있던 자리에 오래도록 서 있는다. 그 자리를 통과해 불어오는 바람결은 그것의 부재를 더욱 실감하게 한다.


고요한 가운데 새소리가 들린다. 새 울음이 공기 중에 퍼지는 진동은 그 자리가 비어 있음을 날카롭게 강조한다.


‘흔들바위는, 없다.’


그러나 그는 그 자리에 남아있는 무거운 어떤 것을 눈에 가득 담는다. 그것이 마음에 가득 채워질 때까지 바라보고, 쓰다듬고, 감각한다. 그 과정은 어떤 의미에선지 약간의 위로가 된다.


내려갈 채비를 한다. 놀랍게도 아까와 달리 불안과 공포는 들지 않는다.


흔들바위는 없다.

그건 이제 명백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 그의 머리는 온통 이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문장을 곱씹으며 하산을 시작한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해는 이미 뜬 지 오래다. 설경에 반사된 햇빛에 눈이 부시다. 온도가 올라가 입고 있던 옷이 더워지기 시작한다. 땀에 절은 채로 눈을 찡그리며 내려가던 그는 맞은편에서 오던 사람들을 발견한다.


두 아주머니가 수다를 떨며 올라오고 있다. 그리고 그 지점엔 아까 그가 보았던 표지판이 있다. 그는 순간 멈칫한다.


'흔들바위가 사라진 걸 사람들이 알면 안 된다.'


갑자기 그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강하게 사로잡는다. 순식간에 그는 자신이 보았던 안내 표지판을 가리기로 결정한다. 그 생각이 논리적인지 판단할 겨를도 없이 부지런히 내려가 두 사람이 보기 전에 행동으로 옮긴다.

“총각, 벌써 올라갔다 오는 길이예요? 엄청 부지런하네. 울산바위는 아직 한참 남았겠지?” 그는 긴장해서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거 몇 미터 남았나 보게 이쪽으로 좀 나와봐요.” 그는 못 들은 척 표지판 앞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대신에 말을 돌린다.


“여기 처음 오세요?” “어엉 처음은 아닌데 힘들어서 얼마나 남았나 볼라고 그러지. 이리 나와 봐요.” “아휴, 답답하네. 더 이쪽으로 나와 보라니까.”


두 사람의 등쌀에 못 이겨 그는 그만 결국 엉거주춤 비켜난다. “어어, 조금만 더 가면 되겠네. 힘내자구.” 두 사람은 왁자지껄하게 서로 사기를 북돋운다.


그러나 그의 귀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너무 당황해 말도 나오지 않는다. 어버버 하는 그를 두 사람은 신경도 쓰지 않고 올라가 버린다.



‘이게 뭐지?’


그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자신이 보았던 흔들바위 표지판은 무언가에 씻긴 듯 아주 깨끗하다. 그곳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다. 그 위에 울산 바위 가는 길을 알려주는 표지판만 너무도 선명하게 제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그는 손으로 표지판을 만지려 하다가, 거두었다가 입을 막고 주위를 둘러보았다가 다시 표지판을 바라보는 행동을 반복한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두 손으로 눈을 비벼 보아도, 여전히 변한 것은 없다.


‘미쳤어. 드디어 미쳤구나, 임태완.’


그는 얼이 빠진 채로 멍하니 그곳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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