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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어리 Jan 29. 2023

영화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엣 원스"(2022)

인생의 유한함을 위로하는 영화의 방식

"당신이 경험한 그 모든 거절들과 실망들이 당신을 지금 이 순간으로 이끌었어요. (Every rejection, every disappointment has led you to this moment)"


영화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엣원스>(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에서 '알파 버스'에서 온 '알파' 웨이먼드가 여주인공 에일린에게 일어난 상황을 설명하는 대사이다. 다중 우주(multi-verse). 이제는 식상하다 싶을 만큼 친숙한 영화적 설정이 이 영화만큼 더 절묘하게 쓰인 곳이 있을까. SF와 액션, 코미디, 드라마 장르까지 온갖 영화적 요소를 기상천외하게 섞어 놓은 이 영화의 감독 두 다니엘(Daniel Kwan과 Daniel Scheinert)은 일본의 미술가 이케다 마나부(Ikeda Manabu)의 그림에 영감을 받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높이가 채 50센치도 되지 않는 작은 캔버스에 온 우주가 담긴 듯한 Ikeda Manabu의 세밀화 Territory (2004)


여주인공 에블린과 그녀를 둘러싼 환경은 아시아계 미국 이민자의 전형을 재현한다. 차이나 타운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며 3대가 함께 사는 중국계 미국인. 그런 애블린에게 가족은 어떤 존재일까? 노환으로 보살펴야 하는 시아버지와 실없는 장난이나 일삼는 남편, 제멋대로 행동하는 성소수자 딸까지... 에블린에게 가족은 그녀의 어깨를 짓누르는 현실의 무게이자 꿈의 실현을 가로막는 장애물에 가깝다. 생활의 고단함 속에 다정한 미소와 따뜻한 언어를 잊은 그녀는 과거의 선택들을 후회하고 좌절된 희망을 외면하며 살아가는 이 시대의 무수한 중년 여성을 대변한다.


그러나 영화는 이 시대의 애블린들에게 달콤한 판타지 따위로 위로를 건네지 않는다. 대신 가차 없이 "팩폭"을 날리며 ("You are capable of anything… because you are so bad at everything”) 그녀가 감당할 준비가 되지 않는 - 슈퍼히어로의 - 과업을 수행하도록 밀어붙인다. 그리고 지나 온 삶의 여정에서 실제와 다른 선택을 했었다면 달라져 있을 그녀 자신의 모습들을, 무수히 많은 다른 버전의 애블린의 삶들을 반복되는 찰나들로 경험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그녀는 현세에선 발현되지 못했던 (좌절되었던) 자신의 가능성들을 체화하며 점차 강한 존재로 거듭난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에일린의 다중 우주가 인간적 세계만이 아니라는 점은 사막 한가운데 놓인 두 개의 돌덩어리가 나누는 무언의 대화에서 극대화되는데, 여기서 나는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통찰을 역설적으로 떠올리게 되었다.

 

소시지 손가락을 한 우주 속 에일린과 국세청 직원 디어드리
사막의 돌 덩어리로 존재하는 우주 속 에일린과 그녀의 딸 조이

가히 맥시멀리스트의 영화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과잉된 황당무계하고 코믹한 시청각적 요소들로 버무려진 이 영화 끝에 내 머릿속에는 의외로 간결히 단 두 단어만이 남았다. 나를 향한, 그리고 세계를 향한 '다정함'과 '용서'.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니, 기왕불구 남은 삶을 비극보다는 희극의 서사로 전개하는 편이 낫다면, 가끔 우리는 우주의 범위로 사고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아집으로 똘똘 뭉친 나 자신이라는 완고한 존재와 그것을 둘러싼 관계들에서 파생되는 무수한 긴장과 갈등은 돌 덩어리로 가득한 또 다른 우주에서는 짧은 배경음만 남기고 사라져 버리는 모래 바람에 불과한 것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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