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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스 Nov 12. 2020

밤이 낮보다 아름다운 도시 라파즈

라파즈는 해발 3,600미터의 고산 지대에 있는 볼리비아의 수도이다. 사방이 산으로 에워싸인 분지로 특히 야경이 멋진 곳으로도 유명했다. 하지만 불안한 치안 탓에, 대부분의 여행객에게는 그저 우유니 사막에 가기 전에 잠깐 들리는 도시 정도로만 여겨졌다.     


다행히 비행기는 또 연착되는 일 없이 페루를 떠나 무사히 볼리비아 하늘에 닿았다. 우리는 원래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다는 투어로 꼽히는 데스 로드 바이크 투어를 하기 위해 2박 3일 일정으로 계획을 잡았지만, 쿠스코에서 비행기가 딜레이 되는 바람에 라파즈에서는 겨우 하루밖에 시간이 없었다.(그 덕에 아직 살아 이 글을 쓴다.)   


공항 햄버거집에서 와이파이를 연결하니, 야간 버스를 타고 따로 출발했던 종직이로부터 카톡이 와있었다.     

"형 저 11시쯤 도착할 것 같은데 숙소에 얘기해서 버스 터미널로 픽업 좀 나와 주세요. 지금 배터리가 10프로밖에 없어서 연락 못 할 수도 있어요.“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데이터를 충전시킨 휴대폰을 종직이에게 주었다. 도착하면 카톡으로 연락을 하면 되는 일이고, 혹시나 여의치 않으면 캡처해놓은 민박집 주소로 찾아오면 되는 것 아닌가? 배터리는 그냥 휴대폰을 꺼두면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게다가 우리가 문자를 확인한 시간은 이미 10시가 넘었고, 정확한 도착 시간과 장소를 모르는 상태에서 숙소에 픽업을 요청하기는 곤란했다. (남미는 버스회사마다 터미널이 다르다.)  


"알아서 와“     


냉정한 답장과 함께 다시 한번 숙소 약도가 표시된 링크를 보낸 후 나와 형수는 택시를 타고 숙소로 향했다. 택시는 낡은 마후라가 내는 불안한 굉음과 데모 때문에 돌아가야 하니 요금을 더 달라는 기사의 투덜거림이 뒤섞여 윙윙 소리를 냈다.     

     

한 시간 가까이 달려서야 예약해두었던 한인 민박집에 도착했다. 짐을 풀고 여행 책자를 뒤적거리며 어디를 가볼까 계획을 세우려는데, 종직이에게 아직 연락이 없어 마음 한구석이 찝찝했다. 이미 버스 터미널에 도착할 시간은 진작 지났는데 왜 연락이 오지 않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혹시나 무슨 사고를 당하였을까 걱정이 되어 관광은 뒤로한 채 종직이를 찾아 버스 터미널로 나섰다.     


갑자기 쏟아져 내리는 소나기가 또 일정을 꼬이게 만든 종직이에 대한 짜증을 더욱 북돋았다. 시계는 이미 오후 세 시를 가리켰고, 아무리 생각해도 아직 터미널에 있을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우리는, 비행 청소년의 상습 가출 신고를 접수한 경찰처럼 다소 무심하게 터미널 입구에 들어섰다. 물론, 그곳에는 하염없이 주인을 기다리다 지친 똥개 마냥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트릴 것 같은 가련한 표정의 종직이가 있었다.     


안도감과 함께 일말의 미안함마저 눈 녹듯 사라졌고, 왜 멍청하게 아직까지 여기 있냐고 큰 소리로 구박하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쿠스코에서 샀던 'Claro' 유심칩은 페루에서만 쓸 수 있고 다른 남미 국가에서는 사용이 불가하였다. 우리는 인터넷에 올라와 있던 단편적인 글만 믿고 당연히 볼리비아에서도 사용이 가능하다고 착각해 10GB의 넉넉한 데이터를 구매했었는데, 고작 페루에서 반나절만 사용하고 허공에 날린 셈이었다.   

   

종직이는 도리어 답장이 없는 우리를 걱정하며 발만 구르다가 뒤늦게 휴대폰 인터넷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숙소 지도도 미리 다운로드해놓지 않아 찾아오지 못하고, 결국 지나가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 와이파이를 연결한 이후에야 “이거 보면 그냥 터미널에서 기다려”라는 나의 카톡을 확인하고는 그곳에서 무려 네 시간 가까이 추위에 떨고 있었다.     


대충 사는 사람들끼리 모이니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았다. 사정을 듣고 나니 추위에 떨며 입술이 파래진 종직이가 너무 불쌍했다.     


“여기까지 왔으니 '마녀 시장'에라도 가보자.”     


마녀 시장은 말 그대로 마녀를 연상시키는 주술과 관련된 기괴한 소품을 파는 유명 관광지인데, 사실 다른 기념품 샾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하고 조금 더 싼 기념품을 사러 가는 곳이기도 했다.     


회색 하늘에 옅어진 빗줄기가 찬바람에 흩날렸다. 종직이는 열 시간 이상 야간 버스에서 쪽잠을 자고 제대로 된 식사도 하지 못한 채, 무거운 배낭을 메고 슬리퍼를 빗물에 질질 끌며 힘없이 걸어갔다.



“으악”     


시장 초입의 비탈길을 오르던 중 외마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종직이가 길가에 주저앉아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온몸이 피로로 한계에 이르렀던 탓인지, 슬리퍼가 하수구에 걸려 발목을 삐끗한 것이다.     


그 모습이 어찌나 애처롭던지, 절뚝이는 그를 부축하여 택시를 태워 숙소로 보낸 후 형수와 나만 시장에 들렀다. 형수는 페루에서 못 샀던 알파카 인형을, 나는 알파카가 그려진 귀여운 동전 지갑과 우유니 사막에서 입을 화려한 핑크색 바지를 샀다.


마녀 시장


그냥 돌아가기 아쉬워 라파즈의 명물인 케이블카를 타러갔다. 라파즈는 인구 밀도가 높고 소득이 높지 않아 산 위에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이 많은데, 높은 경사와 열약한 도로상태 때문에 케이블카가 도로의 중요 이동 수단이 되었다. 지하철처럼 여러 라인이 있을 뿐 아니라 라인끼리 환승까지도 가능했다.


대충 훑어본 여행 책자에는 '낄리낄리 전망대'란 곳이 유명하다고 했다. 제법 환승까지 해낸 뒤 전망대에서 가장 가까운 정류장에 내린 다는 것이 엉뚱한 곳에 하차하고 말았다. 산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그야말로 라파즈의 달동네였는데, 골목 담장 너머로 비탈길에 지어진 허름한 집들이 빽빽이 어깨를 맞대고 있었다. 듣기로 가난한 사람들은 산 위에 모여 살고, 부유층은 산 아랫마을에서 산다고 했다.     


이미 해는 뉘엿 넘어가고 있었고, 치안이 좋지 않기로 유명한 곳이라 동네 사람을 마주칠 때마다 괜한 두려움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집집마다 걸려있는 빨래와 꾸깃한 신발을 보고 있으니, 사람 사는 곳 다 똑같은데 뭘 그리 겁을 내는지 스스로가 우스웠다.


라파즈의 흔한 달 동네



막상 도착 한 낄리낄리 전망대는 근사한 관광지라기보다는 동네에 있는 평범한 공원에 가까웠다. 궂은 날씨 탓인지 사람이라고는 일본인 커플 한 팀과 우리 밖에 없었다. 하늘 아래 구름이 가득했고, 어슴푸레한 하늘 아래 꽃망울 터지듯 가로등 불빛이 하나 둘 켜졌다.



식사를 마친 뒤 오늘 아무것도 하지 못한 불쌍한 종직이를 위해 다시 케이블카를 탔다. 그것을 왕복하며 투명한 플라스틱 창 너머로 보이는 라파즈의 밤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셀 수없이 많은 노오란 점들이 산등성이에 넘실거렸다. 집집마다 옹기종기 설켜있는 가난과 다툼, 따뜻한 웃음과 북적거림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성냥처럼 도시를 환하게 밝히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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