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비기다.
엘 찰튼의 피츠로이 산은 ‘세계 3대 미봉’으로 꼽히는 곳이라 하여 폼나는 타이틀을 좋아하는 우리의 흥미를 끌어당겼다. 게다가 토레스 델 파이네, 모레노 빙하 공원은 비싼 입장료와 투어비 때문에 돈이 많이 깨졌는데, 엘 찰튼 국립공원은 무려 ‘공짜’가 아닌가? 사실 토레스 델 파이네에서 너무 고생을 해가며 부상까지 입은터라 당분간 산이라면 쳐다보기도 싫어 일정을 바꾸려 했지만 비싼 비행기 티켓 탓에 어쩔 수 없이 이곳에 오게 되었다.
어김없이 늦잠을 자서 이제는 식상한 종직이를 습관적으로 폭행해서 깨운 뒤 엘 칼라파테에서 엘 찰튼으로 향하는 아침 버스를 탔다.
엘 찰튼 정류장에 내리기 전 관광 안내소에 모두 내려 주의 사항과 트레킹 코스 등에 대한 설명을 들었고, 우리는 당일 치기로 ‘라구나 로스 트레스’(Laguna los tres) 호수까지 트레킹하기로 결정했다.(약 10킬로, 왕복 8시간 소요)
11시 반쯤 숙소에서 나와 이십 분쯤 걸으니, 국립공원 입구에 다다랐다. 청명한 날씨에 아름답고 깨끗하게 보존된 자연, 무난한 경사와 디즈니 만화동산에 나오는 붉은 털 딱따구리까지 뭐 하나 나무랄 게 없는 완벽한 풍경이었다.
우리의 등산코스는 마지막 정상 부분만 제외하면 비교적 평탄한 산길이라 하길래 아름다운 경치를 만끽하며 부담 없는 산행을 즐겼다.
이날의 기억은 거의 반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갑자기 계절이 바뀌듯 하늘에 구름이 몰려오더니, 금방 비를 뿌릴 듯이 날씨가 흐려졌다. 중간쯤 전망대에서 산봉우리를 바라보니 이미 어두운 구름으로 뒤덮여 아무래도 오늘은 유명한 봉우리님을 제대로 뵙기가 힘들 것 같았다.
평탄한 구간이 종료되고 최종 목적지인 라구나 로스 토레스로 올라가기 전 마지막 쉼터에 도달했다. 표지판에는 ‘지금부터 정상까지 약 1킬로는 경사가 매우 높으니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올라가지 말라.’는 경고문이 적혀 있었고, 마침 황건적의 장각이 도술을 부리 듯 사방에서 난데없는 눈발이 휘날리기 시작했다.
솔직히 살면서 저런 경고를 귀담아들었던 적이 없었다. 운동선수 시절, 이왕 시작한 도전은 아무리 힘이 들고 고통스럽더라도 끝까지 버텨 쟁취하거나, 아니면 한계에 부딪혀 처참히 실패하는 것만이 정답이라고 배웠다. 여행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미 정상을 향해 출발하기로 결심한 이상 아무리 상황이 여의치 않더라도 끝까지 가봐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하지만 토레스 델 파이네에서 입은 부상 탓에 오르막을 걸을 때마다 통증이 밀려왔고, 어찌해서 올라간다 하더라도 내려오는 것은 더 큰 문제였다. 종직이는 웬일로 의욕을 앞세우며 혼자서라도 올라가겠다고 했다. 구름 아래 감추어진 피츠로이의 실루엣을 아득히 바라보며, 나는 결국 발걸음을 돌리기로 했다.
‘오늘 못하면 내일 하면 되지‘ 라는 말이 통하지 않고, 오직 지금 이 순간만이 나에게 허락된 유일한 시간임을 깨닫고 짧은 삶을 더욱 아쉽고 감사하게 느끼게 하는 것이 여행이 주는 매력 아닐까?
같잖은 똥폼 철학을 떠올리며 혼자 하산을 시작한 지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때였다. 갑자기 배가 살살 아프더니 급똥이 마렵기 시작했다. 흥분하지 않고 침착히 조금 더 내려가니 이번엔 또 오줌이 마렵기 시작했다. 분명 마지막 쉼터에서는 아무런 신호가 없어서 화장실을 이용하지 않았었는데, 한 시간 남짓 사이에 이렇게 급진적으로 생리 활동이 일어나다니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다행히 캠핑장 근처에 공중 화장실이 있었다. 소변을 해결하고 싶었지만 행여나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큰 놈들 때문에 괄약근에 힘을 풀 수가 없었다. 휴지는 당연히 없었고, 아르헨티나의 첩첩산중에서 호박잎을 구할 수도 없었기에, 결국 소변을 해결하지 못한 채 다시 화장실 밖으로 걸어 나왔다.
엘찰튼은 자연보호가 엄격하기로 유명하다고 했다. 함부로 자연에 방생하였다가는 국제적 망신을 당할 수도 있었다. 시간을 계산해보니 약 2시간이면 충분히 숙소까지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콧노래를 부르며 일부러 셀카와 풍경 사진을 찍으며 "나는 너무 행복해."라고 자기 최면을 걸었다. 문득 2년 전 스쿠버 다이빙을 하던 중, 전날 먹은 쭈꾸미 볶음 때문에 갑자기 배탈이 났던 기억이 났다. 하마터면 수심 10미터에서 물고기 떼를 부를 뻔했던 인생 최대의 위기도 침착하게 극복하였던 나 아닌가? 고작 두 시간쯤 참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카프리 호수를 지나 이제 삼십 분 정도만 더 가면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너무 아무렇지 않은 척 폴짝 뛰면서 내려온 탓인지 아니면 삼십 분 밖에 남지 않았다고 방심했던 탓인지, 놈들이 앞뒤에서 동시에 나를 압박했다. 그들의 역습에 당황한 나는 뒤에 있던 사람들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갑자기 무릎을 감싸 쥐며 주저않아 다리가 아픈 것처럼 위장한 채, 말 그대로 ‘자신과의 싸움’을 벌였다. 인생 통틀어 가장 간절했던 기도를 하늘에 드리며 약 삼십 초 간의 그들과의 승부에 전력을 쏟아부었다. 나는 정말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결국 그 싸움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아니, 그럼 또 다른 내가 나를 이긴 셈이므로 결국 서로 비긴 건가? 끝까지 방광에 힘을 풀지 않았음에도 타이즈에 오줌을 지렸다.
때마침 오솔길 앞뒤로 단체 등산객들이 지나갔다. 나는 초인적인 스피드로 숲길로 달려나가 나무 뒤에 숨었고, 마침내 해탈의 경지에 이른 현자가 되었다. 신기하게도 작은 녀석들이 떠나자 큰 녀석들도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나이 서른두 살에, 그것도 대한민국 지구 반대편의 첩첩산중에서 난데없이 오줌싸개가 되어 옷도 갈아입지도 못한 채 넋이 빠져 터벅터벅 숙소까지 걸어갔다.
종직이는 저녁 해가 지도록 숙소에 돌아오지 않아 사람을 걱정시키더니 밤 9시가 넘어서야 숙소에 도착했다. 산 정상의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실컷 사진을 찍다 보니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고 했다. 정말 한결같이 대책 없는 놈이었다. 종직이는 내 굴욕적인 에피소드를 듣고 나서는 자신의 남미 여행 최고의 장소는 바로 엘 찰튼이라며 손뼉 치며 좋아했다.
다음 날 새벽, 엘 찰튼 버스 터미널을 나서며 마을 뒤편을 바라보니, 내가 그토록 보고 싶었던 구름 한 점 없는 피츠로이의 산봉우리가 상기된 분홍빛 하늘과 함께 나를 놀리듯 미소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