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세계 3대 폭포 중 하나로 손꼽히는 이과수 폭포를 보러 가는 날이다.(북미 나이아가라, 아프리카 빅토리아, 남미 이과수)
거대한 규모로 인해 아르헨티나, 브라질, 파라과이 3개국 국경에 걸쳐 있는데, 우리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서 각 한 번씩 폭포를 구경하기로 했다.
아르헨티나에 이과수 공원이 브라질에 비해 규모가 커서 둘러보는데 시간이 좀 더 걸린다고 했다. 시간이 다소 촉박한 첫째 날에 브라질 공원을 먼저 둘러보고 다음 날 아르헨티나 쪽에서 여유있게 다시 구경하기로 했다.
우리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아르헨티나 이과수 마을까지 비행기로 이동한 뒤 숙소에 체크인만 하고 서둘러 브라질 이과수 폭포로 가기 위해 버스 터미널로 이동했다.
얼마지나지 않아 유리창에 큼지막하게 'FOZ DU IGUAZU'라고 적힌 버스가 플랫폼 안으로 도착했다. 우리는 당연히 버스가 브라질 이과수 폭포로 바로 갈 줄 알고 버스에서 멍 때리며 쉬고 있었는데, 갑자기 버스가 어딘 가에 멈추더니 기사가 우리보고 여기서 내려야 된다고 말했다. 밖을 보니 브라질 국기가 눈 앞에서 펄럭이며 쌈바춤을 추고 있었다.(알고 보니 국경이 바뀌어서 브라질 버스로 갈아타야 했다.)
버스는 어쩔 줄 몰라 당황하던 우리를 브라질 입국 심사대 앞에 뱉어버리고 그냥 떠나버렸고, 우리는 입국 심사를 마친 뒤 다른 버스를 붙잡아 겨우 브라질 이과수 마을에 도착했다. 다시 이과수 폭포까지 가려면 브라질 돈이 필요했기에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힘겹게 환전까지 마치고 나니 벌써 진이 다 빠져버렸다. 어렵게 폭포로 가는 버스를 탔지만 혹시나 또 다른 곳으로 갈까 봐 도착하는 순간까지 불안한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알고 보니 아르헨티나 페소도 브라질 버스비로 사용 가능하여 환전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공원 내 셔틀버스를 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폭포가 보이는 전망대에 도착했다. 대지를 부숴버릴 듯이 포악하게 울부짖는 폭포를 보고 있으니 엄청난 힘에 압도되어 그대로 폭포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오싹함이 일었다. 그 느낌은 어린 시절 컴컴한 밤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심연의 우주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아 두려웠던 막연한 공포와 비슷했다.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사진을 찍고 폭포를 구경하니 두 시간 정도가 지났다. 너무 늦으면 다시 아르헨티나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아 걱정스러운 마음에 서둘러 공원을 빠져나왔는데, 막상 어떻게 아르헨티나로 돌아가야 할지 막막했다. 공원 앞에는 택시기사들이 말도 안 되는 가격을 제시하며 호객을 해댔다.
마침 우리 앞에 있던 스페인 미녀들이 아르헨티나로 돌아간다고 했다. ‘이 여자애들 뒤만 따라다니면 집에 갈 수 있겠구나.’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버스는 다시 포즈 두 이과수(브라질)로 향했고, 그곳에서 푸에르토 이과수(아르헨티나)로 가는 버스로 갈아타야 했다. 늦은 시간임에도 지역 사람들로 만원이었던 버스는 역시나 우리를 아르헨티나 국경 심사대에 버린 후 그대로 떠나버렸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다음 버스가 곧 올꺼야”
바르셀로나에 왔다는 누리아가 친절히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우리를 제외한 나머지 승객들은 마을 주민이라 입국 심사가 면제됐기에 우리만 남겨 둔 것이라 했다.
그렇게 낙오된 이들은 바르셀로나 미녀 둘(누리아, 치치), 그리고 부에노스아이레스 커플(크리스티안과, 그라씨엘라), 그리고 우리까지 총 여섯 명이었다. 우리는 어둠이 짙게 깔린 고속도로 벤치에 앉아 추위를 견뎌가며 삼십 분 안에 온다던 다음 버스를 기다렸다.
역시나, 남미의 버스는 제시간에 나타나는 법이 없었다. 시간은 어느덧 두 시간을 훌쩍 넘겨 저녁 9시가 되었다. 추위를 견디다 못해 화가 난 누리아가 히치하이킹을 시도하다 검문소 경찰 아저씨에게 제지당했다. 불법이라서 안된다고 하니 그럼 걸어서라도 가겠다고 고집을 피우며 아저씨와 실랑이를 벌였다. 밤이 더욱 깊어져 이제는 통행하는 차량도 많이 줄어들었음에도 버스는 여전히 나타날 기미가 없자, 결국 경찰 아저씨가 국경을 통과하던 아르헨티나 차량을 불러 세워 우리가 무사히 숙소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우여곡절 끝에 아르헨티나에 도착을 하니 밤 10시가 넘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잘생긴 아르헨티나 청년 크리스티안이 말했다.
“너네 아르헨티나식 바비큐(아사도) 먹어봤니? 내가 기가 막히게 잘하는데 우리 호스텔에서 저녁 같이 먹을래?”
안 그래도 추위와 배고픔에 괴로워하고 있던 우리는 그 소리가 어찌나 반갑던지, 망설일 새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좋아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택시 기사를 한다는 유쾌한 성격의 크리스티안은 여자 친구와 둘이서 틈틈이 여행을 다닌다고 했다. 기타리스트로도 활동한다며 유튜브로 자신의 밴드음악을 들려주었는데 헤비메탈 계열의 락밴드였다.
내가 만약 한국에서 택시기사를 한다면 크리스티안처럼 멋지게 살 수 있을까? 우리나라보다 경제사정이 못한 아르헨티나에서, 그것도 고소득 직업이 아님에도 스스로의 삶을 다양한 방식으로 즐기며 살아가는 것을 보니, 과연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무척 궁금했다.
크리스티안은 아르헨티나에서는 원래 저녁을 늦게 먹는다고 너스레를 떨며 자정이 다 된 시간에 호스텔 주방에서 고기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고기를 익히기까지는 무려 한 시간이 더 걸렸다. 화덕에서 갓 꺼내 기름이 쫙 빠진 아사도는 속이 굉장히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두툼히 썰어 맥주와 함께 맛있게 먹으니 고단했던 오늘 하루를 완전히 보상받는 기분이 들었다.
“살루트”(건배)
다른 투숙객들이 모두 방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우리의 건배 소리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말도 잘 통하지 않았고 반년도 더 지난 일이라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거의 기억도 나지 않지만, 그날의 허기와 화덕에서 익어가던 아사도의 고소한 냄새, 자정이 훨씬 넘어 맛보았던 고기 한 점의 감칠맛과 서로가 나누었던 웃음의 따뜻한 온기는 아직도 선명한 오감으로 남아 여전히 코끝을 맴돈다.
우리가 꼼꼼한 성격이라 사전에 정보를 잘 확인해서 실수하지 않았더라면 제시간에 맞춰 여유 있게 폭포를 구경하고 숙소로 돌아와 푹 쉴 수 있었을까? 하지만 우리는 여행 내내 그러지 못했고 매번 변수로 인한 각종 짜증스러운 상황을 마주하며 서로를 원망하고 또 자책했다. 그렇지만 저 날의 특별한 경험 또한 우리 특유의 허접함이 불러일으킨 예상치 못한 행복이었기에 우리가 늘 ‘틀렸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음날은 아르헨티나 이과수 폭포에서 반나절을 신나게 보냈지만, 나에게 이과수하면 세계적으로 손꼽힌다는 엄청난 폭포가 아닌 국경 검문소에 버려진 채 같이 추위에 떨던 친구들과 함께한 그 날 밤의 늦은 식사가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