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취와 아쉬움을 가득 안고 칠레 국경을 벗어나 아르헨티나 ‘엘 칼라파테’ 마을에 도착했다. 푸에노스 나탈레스가 사실상 토레스 델 파이네를 위한 마을이었다면 엘 칼라파테는 ‘모레노 빙하‘를 위한 마을이었다.
모레노 빙하를 즐기는 가장 대중적인 방법은 크게 세 가지 정도가 있었는데, 첫 번째는 로스 글레시아레스 국립공원 빙하 전망대에서 구경만 하는 방법, 두 번째는 빙하를 직접 걸어보는 빅 아이스 트레킹(5시간 소요), 마지막으로 조금 덜 걷는 미니 아이스 트레킹(1시간 30분 소요)이었다.
전망대에서 보기에는 뭔가 좀 아쉽고, 빅 아이스 트레킹은 터무니없이 비쌌기에 그나마 만만한 '미니 아이스 트레킹'을 하기로 결정했다. 투어는 한 회사가 독점하여 운영하기 때문에, 어떤 여행사에서 예약하더라도 가격이 같고 에누리조차 되지 않는다고 했다. 몇 곳을 돌아다니며 흥정을 시도해 봤지만 역시나 “너 말고도 갈 사람 많아.”라는 태도라 한 푼도 깎지 못했다. 남미에서 했던 모든 투어 중 가장 비쌌는데, 무려 인당 3천3백 페소나 되는 미친 가격이었다.(입장료까지 포함하면 대략 한화 20만 원) *18년 3월 기준
다음날 오전 9시에 숙소 앞으로 픽업 온 버스를 타고 로스 글레시아레스 국립공원으로 향했다. 공원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멀리 거대한 빙하의 윤곽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달짝지근한 소다맛 뽕따 아이스크림같이 생긴 얼음조각들이 빽빽이 들어붙어 거대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그 엄청난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열심히 셔터를 눌러댔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어젯밤 메모리를 백업한 뒤 카드를 숙소에 두고 온 것이었다. 평생에 한 번 볼까 하는 광경을 눈앞에 두고 제대로 된 사진 한 장 남길 수 없다니 이 무슨 비극이란 말인가... 옆에는 종직이가 칠레에서 새로 산 화웨이의 200만 화소 휴대폰을 들고 좌절하고 있었다.
그 순간, 최대 70m 높이의 거대한 빙벽이 우레와 같은 굉음을 내며 호수 속으로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나도 모르게 “와” 짧은 함성이 튀어나왔다. 저 멀리 보이지 않는 빙하의 뒤편에는 일 년에 300일 이상 눈이 내린다고 했다. 그곳에서 매일 새로운 빙하들이 태어나고 그 압력으로 앞으로 밀려 나온 늙은 빙하들이 마지막으로 힘을 모아 큰 숨을 내쉬고는 거대한 생을 마감한 채 자연의 일부로 돌아갔다. 감히 가늠할 수조차 없는 억겁의 세월을 거친 자연의 대순환을 보고 있으니, 비루한 우리 삶의 길이가 덧없이 짧게 느껴져 퍽이나 서글펐다.
마침 전날 같은 호스텔에서 묶었던 해인 씨를 만났다. 천사 같은 그녀는 카메라 메모리카드를 안 가져왔다는 나의 병신 같은 소리를 듣더니, "전 어차피 빙하 트레킹을 하지 않으니 제 걸로 사진을 찍으세요."라며 흔쾌히 본인의 메모리카드를 빌려주었다.
전망대 벤치에 앉아 사이좋게 점심을 나눠먹고, 종직이와 나, 그리고 처음 만난 경래까지 세 명은 페리를 타고 미니 트레킹 장소로 이동했다. 페리 유리창 너머로 멀어 보이던 빙하가 점점 줌 인 되며 커져갔다. 그 거대함을 눈앞에서 마주 보자 압도되어 말문이 막혔다.
선착장에 내려 베이스캠프 도착 후 간단히 안전 교육을 받았다. 먼저 신발에 미끄럼 방지용 아이젠을 채우고 빙하에서 걷는 방법을 연습했다. 뒤뚱거리며 걷는 사람들이 푼타 아레나스에서 본 펭귄들 같았다. 우리는 신성한 마음으로 지구의 역사를 품은 대자연에 감히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본 빙하는 상상으로 그리던 순백의 얼음이 아니었다. 알 수 없는 시커먼 입자들이 바람에 날려 사방에 묻어있었는데, 마치 밤새 흰 눈이 쌓이고 난 뒤 도로 모퉁이에 뭉쳐져 버려진 얼음 찌꺼기를 밟는 듯했다. 사진을 찍어도 거무튀튀한 게 역시나 이쁘게 나오지 않았다. “인터넷에서 봤던 그 순백의 빙하 사진들은 모두 포토샵이란 말인가?” 하는 의구심까지 들 지경이었다. 저 높이 솟은 얼음 고개를 하나만 넘으면 그 뒤로 그림 같은 새하얀 빙하의 숲이 펼쳐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가이드는 더 이상 위로 올라가는 건 위험하니 이제 그만 내려가자고 했다.
트레킹을 마치니 잔에 얼음 대신 빙하를 채워 위스키를 따라 줬다. 그걸 마시고 있으니 대동강 물을 팔았던 봉이 김선달이 떠올랐다.
비싼 투어비를 생각하니 되게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나만 좀 별로였나 싶어 종직이와 경래에게 어땠냐고 물어보니, 둘 다 정색을 하며 돈이 너무 아깝다고 투덜댔다. 누가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 했다던데 우리에겐 모레노 빙하가 그랬다. 하지만 빙하를 못 밟고 돌아갔더라면 그것은 더욱 아쉬웠을테니, 조금 비싼 값에 치른 경험일 뿐 후회하지는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