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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스 Nov 12. 2020

W 트레킹 이틀 차, 시련의 계절

토레스 델 파이네 W 트레킹 3박 4일 여행 

텐트를 걷고 나니 벌써 10시가 넘었다. 딱히 빈둥거리지도 않은 것 같은데 기가 찰 노릇이었다. 이미 사람들은 모두 떠났고, 우린 어제처럼 제일 늦게 등반을 시작했다.  

    

오늘은 W 모양의 중심인 브리타니코 전망대를 거쳐 꾸에르노스 캠핑장까지 가야만 했다, 바람이 어찌나 세게 불던지, 호수에서 휘몰아친 물보라가 몇백 미터 떨어진 우리의 뺨을 때렸다. 그 매서운 공격에 온몸을 휘청거리며 겨우 버티다 어느덧 이탈리아노 산장에 다다랐다. 


 털썩 주저않아 브리타니코 전망대 쪽을 바라보니, 흐린 날씨 탓에 설산은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 나오는 북쪽 장벽같이 으스스해 보였다.


물보라를 뚫고 나아가는 길
이탈리아 산장을 건너기 전에 나오는 구름다리(한 번에 한 명씩 건너야 한다.)
무서워 보이는 설산


엄청난 바람에 휘청거리는 종직

전망대를 향해 등산을 시작하자 거친 맞바람이 불어 닥쳤다. 9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내 몸이 공중으로 붕하고 날아갈 것만 같았다. 눈물 콧물을 사방에 휘날리며, 안감힘을 써서 겨우 몇 발자국을 떼어보았다. 흐린 날씨 탓에 브리타니코로 가는 길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너무 무모해 보였다.      

결국 중간에 발걸음을 돌려 하산해야 했는데, 후에 들은 얘기로 너무 강한 풍속 탓에 그날 전망대는 폐쇄되어 출입이 금지되었다고 했다.  

   

날씨가 더욱 흐려지더니 급기야 빗방울이 더욱 굵어지기 시작했다. 전방 십자인대 재건술을 받은 무릎이 시큰거려 내리막길을 걷기가 불편했다. 이 속도로 가다가 해가 진 이후에 캠핑장에 도착하면 텐트 치기가 곤란했다. 내 배낭 속에 우겨넣었던 텐트를 종직이 가방에 옮긴 후 생각보다 체력이 좋은 종직이를 먼저 산장으로 보냈다. 나는 다리를 절뚝이며 그 뒤를 겨우 쫓았다.  

    

굵어진 빗방울이 바람을 타고 사선으로 날아와 사정없이 바람막이를 때려댔다. 체온은 계속해서 떨어졌고, 비를 머금은 배낭과 등산화는 갈수록 그 무게를 더해갔다. 내 몸은 태어나서 이런 종류의 빡셈은 처음 겪어본다는 듯이 힘들어했는데, 씨름 선수 시절 그 지옥 같았던 훈련들도 그날의 고단함을 견디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미 꽤 늦은 시간이라 오고 가며 마주치는 등산객들이 점점 줄어들다 어느덧 그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게 되었다. 오후 여섯 시쯤, 물보라가 매섭게 몰아치는 호수를 옆에 끼고 갑자기 길이 끊어졌다. 어디로 가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여기서 해가 떨어지면 캠핑장에 닿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 길이 아닌 것 같은데...” 몇 번을 가던 길을 멈추고 처음으로 되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걷지고 못하고, 하루 종일 비바람을 맞다가 이제는 혼자서 조난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서글퍼 찔끔 눈물이 돌았다.


시련의 호수, 이 곳에서 길을 헤매는 사람들이 꽤 많다고 한다.


한참을 헤매다 겨우 사람들의 발자국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거의 실신한 채 쿠에르노스 산장에 도착했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쏟아지는 비를 온몸으로 받으며 텐트를 쳐야 했다. 우리가 낑낑대며 애를 쓰는 동안 빗물은 이미 텐트 속을 축축이 적셨다. 설상가상으로, 바닥에 깔아야 할 매트리스는 언제 바람에 날아가 버렸는지 배낭을 아무리 뒤져봐도 찾을 수 없었다.      


이틀동안 눈물과 빗물로 범벅된 더러운 몸을 씻으러 공용 샤워실로 뛰어갔다. 홀딱 벗은 채로 이빨을 딱딱 부딪히며 서둘러 샴푸질을 한 뒤 힘차게 밸브를 돌렸는데, 샤워기 꼭지에서는 천장에 빗물새듯 동그란 물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욕설을 내뱉으며 물방울 샤워를 끝낸 후 젖은 몸을 부들거리며 산장 레스토랑으로 뛰어갔다. 식당은 사람들의 체온과 입김이 백열등의 따스함 아래에 뒤섞여 푸근한 온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텀블러에 뜨거운 물을 받아 믹스 커피를 휘휘 저어 마시고 나니 이제야 오늘 하루가 마무리 된 것 같아 마음이 풀렸다.     

모처럼 밥 다운 밥을 먹고 짐을 줄인다는 핑계로 챙겨온 팩와인을 전부 가져와 마셨다. 어느덧 기력을 회복한 우리는 전장에서 살아 돌아온 병사들처럼 신이나 무용담을 늘어놓으며 떠들어댔다. "다들 피곤하긴 한가 보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렇게 늦은 시간이 아니었음에도 식당에는 우리밖에 남지 않았기에 그만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서기로 했다.      


텐트로 돌아가기 전에 전날처럼 새벽에 목이 마를까 봐 식당에 들러 가득 뜨거운 물을 챙겼다. 그런데 그 잠깐 사이에 종직이는 벌써 텐트로 돌아 가버렸는지 사라져버렸다. 식당에서 우리 텐트까지는 고작 50m 정도 되는 거리였지만, 칠흑 같은 어둠 탓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후레쉬 기능이 있는 휴대폰은 종직이가 가지고 있어 나는 그만 발이 묶여 버렸다. “종직아”를 목청껏 불러보았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텐트촌에서 계속 고성을 질러대는 것도 민폐였기에 감에 의지하여 걸어가다 자꾸 막다른 길에 부딪혔다. 컴컴한 암흑의 가운데서 도저히 방법이 없어 다시 왔던 길을 조심히 되돌아 식당으로 향했다. 하지만 발아래 있던 계단까지 미처 살필 수는 없었다. 허공을 디딘 오른발이 미끄러지면서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손에 들고 있던 텀블러가 공중제비를 돌아 뜨거운 물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무릎이 계단에 쓸려 피까지 날 정도였다.          

“아 씨X 종지그아아악~~~~~~~~~”  


“형 어디 갔었어요?”           


어린이집에 관찰 카메라라도 설치한 듯 기가 막힌 타이밍에 종직이가 후레쉬를 비치며 나타났다. 텐트는 터무니없이 가까운 곳에 있었다. 저기서 잘 수 있을까? 라는 우려와 달리 머리를 대자마자 곤히 잠들었다.(다음날 소정이가 어젯밤에 한국 사람 비명 지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냐고 물어봤다.)      

   




아침에 눈을 뜨니 어제 비가 내렸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화창하고 평온한 날씨가 펼쳐져 있었다. 이틀간의 명암 차이가 너무나 극적이라 전 날과는 전혀 다른 계절이 찾아온 것 같았다.


쿠에르노스 산장에서 금일 숙박 예정지인 칠레노 산장까지는 그렇게 멀지 않았다. 대략 4시간 정도면 갈 수 있다고 했는데, 사진도 찍으며 쉬엄쉬엄 가니 5시간 정도가 소요됐다. 




체크인을 끝내고 텐트를 칠 수 있는 장소를 배정받았다. 비탈진 산기슭 중턱에 번호표가 달린 평상들이 설치돼 있었다. 우리는 하필 제일 정상에 있는 자리였는데, 거기까지 올라가는 것이 거짓말이 아니라 지금까지 등산한 것 중에 가장 힘들었을 만큼 경사가 높았다. 빗물 때문에 땅까지 질어 네발로 기어가다시피 해서 겨우 텐트를 설치할 수 있었다.

  

모처럼 여유롭게 음악을 듣고 커피를 마셨다. 산장 화목 난로 앞에서 각국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담소를 나누며 젖은 신발과 옷들을 말렸다.    

 

한편으로는 너무나 한가롭고 평화로운 이 순간이 최종 목적지인 토레스 정상에 오르기 전 폭풍전야가 아닐까라는 불안감이 슬금슬금 기어오르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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