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레스 델 파이네 w트레킹 3박 4일 여행 마지막 날
새벽 04시, 텐트 밖으로 나오니 아직 칠흑같은 어둠에 찬 공기가 가득했다. 산장 문을 열고 식당 안에 들어가니 새벽 일찍 출발하는 사람들을 위한 가벼운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몇몇의 사람들과 함께 따뜻한 커피에 몸을 녹이며 간단한 식사를 마쳤다. 일정 내내 늦장을 부리다 곤란함을 겪었지만 마지막 날만큼은 남들보다 일찍 하루를 시작한다는 생각에 퍽이나 상쾌했다. 멀리서 사람들의 헤드랜턴 불빛이 산등성이에 넘실거렸다. 우리는 휴대폰 플래쉬의 한 줄기 빛에 의지하여 어둠 속을 헤쳐나갔지만 역시나 제대로 된 방향을 찾지 못해 헤매기 일쑤였다.
고작 30분 정도 걸었을까? 전날부터 아팠던 무릎과 골반으로부터 고통스러운 통증이 몰려왔다. 지난 삼 일간의 고생을 생각하니 서러우면서 짜증이 났다. 여기까지 와서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는 노릇이라, 어금니를 꽉 깨물고 허공에다 크게(그러나 아무에게도 안 들릴 정도로) 욕설을 내뱉으며 참고 또 참았다.
천천히, 한 발자국씩 조심스러운 페이스로 걸어 나가다 보니 뒤에 있던 할머니까지 성큼 우리를 앞질러 나갔다. 잠깐 허리를 숙이고 숨을 고르다 고개를 높게 들었다. 수풀이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하늘을 촘촘히 수놓은 별과 은하수가 우리를 감싸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며 산속을 걷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 경탄스러워 연신 고개를 젖히며 길을 걸었다.
출발한 지 두 시간 반쯤 지나니 멀리서 태양이 오고 있는 듯 하늘은 새벽의 푸른 공기를 내뿜었다. "지금쯤 정상에 도착할 시간이 됐는데..." 묵묵히 앞에 있는 유럽인 그룹을 따라 걸어갔는데 갑자기 반지의 제왕에나 나올 법한 급경사의 돌산이 나왔다. 정상에 닿기 위해 통증을 깡다구로 버티다 급기야는 네 발로 기어서 올라갔다.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지려는 찰나, 선두에 있던 외국인으로부터 절규에 가까운 소리가 들려왔다.
“This is a wrong way!!“(이 길이 아니야~~)
왔던 길을 20분 이상 다시 기어 내려간 후에야 토레스 델 파이네의 랜드마크인 삼봉이 보이는 호숫가에 도착했다. 드디어 목표지에 도달했다는 기쁨은 잠시뿐, 해가 뜨려면 아직 멀었는데 추위를 견디기가 너무 힘들었다. 몸을 녹일 따뜻한 커피 한 잔이 너무나 간절했지만 배낭에는 딱딱한 빵 한 조각밖에 남은 게 없었다.
뾰족한 바위와 자갈 사이에 불편하게 누워 싸구려 은박 담요로 몸을 감싼 채 태양이 세상을 자신의 빛으로 물들이는 순간을 지켜보았다. 마법 같은 장관을 바라보며 우리는 온몸이 떨리는 전율을 느꼈다. 스며드는 햇살보다 바람이 체온을 앗아가는 속도가 너무 빨랐기에 말 그대로 몸을 덜덜 떨다 그 자리에 가만히 얼어버리고 만 것이다. 4일간의 개고생을 마무리하는 피날레의 순간이었지만 추위가 너무 괴로워 그저 시간이 빨리 흘러 오늘 하루가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태양이 언 몸을 스르륵 녹이자 단순한 우리는 금새 또 기분이 좋아져 신나게 사진을 찍으며 놀았다. 그러다보니 원래 계획보다 시간을 많이 지체해 버렸다. 벌써 정오가 지난 시각, 오후 두 시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야 했는데, 산장에서 터미널까지 걸어가는 시간을 계산하면 서둘러 하산해서 짐을 챙겨야 했다. 나는 이미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는 상태라 종직이에게 텐트 정리를 맡기고 먼저 터미널로 출발했다.
오르막에서는 왼쪽 골반이 찢어진 듯 아팠고, 내리막에서는 오른쪽 무릎이 욱신거렸다. 교대로 다리를 절뚝이며 등산스틱을 목발처럼 짚어 걸어 나갔다. 왜 뒤늦게 사진을 찍는다고 늦장을 부리다가 또 이 지경이 되었을까? 정상에 올랐으니 이제 다 끝났다고 방심했었는데 발을 씻고 침대에 눕기 전까지는 긴장을 풀면 안 되었다.
정말 죽어라 뛰었다. 얼마나 전력을 다했는지, 막상 목적지에 도착하니 예상 도착 시간보다 삼십 분이나 빨랐다. 화장실에 들어가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니 거지가 따로 없었다. 4일간 면도는커녕 제대로 된 샤워와 세수 한 번 못하고 옷은 땀과 흙먼지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결국 마지막인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모든 에너지를 짜내어 너덜너덜해진 이후에야 털썩 주저앉아 쉴 수 있었다.
종직이는 역시나 버스 출발 시간이 다 되어가도록 나타나지 않아 나를 애타게 하더니, 겨우 5분을 남기고 천하 태평한 얼굴로 도착하여 함께 있던 한국 산악회 어르신들의 기립 박수를 받았다.
버스를 갈아타고 다시 푸에르토 나탈레스 마을로 되돌아갔다. 우리다운 허접한 방식으로 4일간의 여정을 무사히 잘 마무리하였다고 서로를 다독이며 장비를 반납하러 렌털 샵에 돌아갔다.
텐트를 정리하다 매트리스를 분실한 것이 생각났다. 방금 돌아오는 버스에 등산 스틱을 두고 내린 것을 알아챘다. 3만 페소를 물어내라고 하길래 거지꼴을 한 채로 깎아달라며 사정하고 있었는데, 종직이가 반납한 방수 바지의 가랑이가 찢어진 것이 확인되었다. 그나마 깎아서 3만 3천 페소를 추가로 지불했다. 서로 하나씩 해쳐먹어 미안한 마음이 없어졌는지, 뻔뻔하게 상대방의 실수를 비난하며 티격태격하면서 숙소로 되돌아왔다. 저녁에는 트레킹을 함께 한 친구들과 서로를 치하하며 라면과 소고기, 맥주와 와인을 배가 터져라 먹고 마시다 필름이 끊기듯 곯아떨어졌다.
그러고 보면 행복이란 참으로 묘하다. 우리는 흔히 행복에 대해 이야기할 때 쾌락과 웃음, 안락함과 같은 긍정적 정서에 대해 말한다. 하지만 토레스 델 파이네에서의 날들은 쾌락을 주기보다는 고통을, 웃음보다는 짜증을, 편안함보다는 고단함을 주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일정 내내 멋진 자연을 마주보며 느끼는 감동보다는 "아 xx 겁나 힘들다." 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내내 떠나지 않았으며, 궂은비와 거센 바람을 맞으며 체력은 어느덧 한계에 부딪혔다. 준비성이 없어 제대로 된 끼니도 챙겨 먹지 못했고, 축축한 텐트에서 밤새 바람 소리를 들으며 선잠을 잤으며, 비와 땀에 절은 옷과 신발을 신고 다리를 절뚝이며 걸었다. 심지어 최종 목적지인 삼봉을 마주하고도, 감동의 전율이 아니라 떨어진 체온 때문에 덜덜 떨다 서둘러 내려와야만 했다.
어떻게 그런 엿 같은 상황을 떠올리면서 입가에는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것인가? 어떻게 그 복잡한 사건과 다양한 감정들이 뒤엉키고 발효되어 행복이란 맛있는 음식이 될 수 있었을까? 산티아고에서의 '분실'과 다툼, 아타카마의 살인적 물가와 더위, 토레스 델 파이네의 생고생 등. 칠레는 나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고생을 선사해 줬다. 그럼에도 분명 나는 그곳에서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대한민국에서 아래로 땅을 계속 파면, 결국 만나게 된다는 지구에서 가장 먼 나라 칠레여, 그럼 챠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