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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스 Nov 12. 2020

토레스 델 파이네, 전설의 시작

토레스 델 파이네 W트레킹  첫째 날


아침 6시 30분, 긴장을 하고 잔 탓인지 휴대폰 알람이 울리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벌떡 눈이 떠졌다. 불 꺼진 도미토리 2층 침대에서 조용히 몸을 빼내 배낭을 챙겨 좁은 복도 모퉁이로 나온 후, 대강 짐을 정리하고 아침 식사를 때웠다. 꽤 서둘렀음에도 벌써 시계는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버스 출발 시간이 7시 30분이었는데, 숙소에서 터미널까지는 걸어서 20분이 걸렸다.      


종직이에게 어서 출발하자고 재촉하니 빨리 양치만 하고 나오겠다고 했다. 혹시나 하는 불안감에 2층으로 올라가 보니 종직이의 가방이 아직 정리되지 않은 채 복도에 널브러져 있었다. 시간이 없으니 서두르라고 호통을 친 뒤, 조급한 마음에 먼저 숙소 밖으로 나와 그를 기다렸다.    

  

종직이가 짐을 다 챙기고 밖으로 나온 시각은 정확히 7시 17분이었다. 이 버스를 놓치면 정말 답이 없었다. 식량과 텐트를 넣어 불룩해진 60L짜리 배낭을 짊어 메고 어두운 새벽 거리를 필사적으로 뛰었다. 땀이 범벅되어 속옷이 다 젖었고, 수술한 오른쪽 무릎은 삐걱 소리를 내며 욱신거렸다.    

  

다행히 제시간에 맞춰 간신히 터미널에 도착했다. 숨을 크게 고른 후 마지막 승객으로 버스에 올랐다. 왜 매일 아침마다 이런 바보 같은 일을 반복해야 하나 너무 화가 났다.    

 

 에메랄드빛의 호수와 안데스의 그림 같은 설산들이 버스 창문을 스쳐가고 있었지만, 머릿속이 짜증으로 가득 차 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종직이는 역시나 세상 걱정 없는 표정으로 입을 벌린 채 자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과 자고 있는 종직이



이 곳에서 버스에서 내려 표를 사야 한다.

버스는 어느덧 공원 입구에 있는 매   표소에 도착했다. 며칠째 반복되는    트러블에 안 되겠다 싶어 종직이와   진지하게 얘기를 나눴다.

“종직아 너는 방학이라 별생각 없이 그냥 따라온 여행이겠지만 나는 이번 여행을 반년 전부터 준비해왔어. 앞으로는 더 이상 깨워주지도 않고 빨리 가자고 재촉하지도 않을 거야. 대신 그냥 조용히 혼자 떠날 테니 너도 더 이상 여행을 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 돌아가도 좋아. 하지만 계속 여행을 할 거라면 최소한 시간 약속은 지켜.”(물론 여기에 XX야 등 적절한 추임새를 곁들였지만...)


종직이도 이번에는 정말 반성하는지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숙인 채 미안하다는 말을 연발했다.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것이 싫어 어깨를 다독인 후 다시 버스에 올랐다. 버스에 먼저 탄 사람들이 공원 지도를 손에 들고 있어서 어디서 얻었냐고 물어보니 매표소에 가면 준다고 했다.   

      

“형 저희도 하나 얻어올까요?”          


종직이는 아침의 실수를 만회해보려는 듯 평소답지 않게 적극적으로 굴었다. 공원 입장권을 챙겨가지 않아 지도를 못 구한 종직이가 다시 다녀오겠다며 서둘러 버스에서 내렸다. 3분 정도 지났을까? 조용하던 버스가 갑자기 부르릉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익스큐즈미“          


나는 당황하여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버스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순간 창문 너머로 종직이가 손을 흔들며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 당황한 표정을 보니 너무 웃겨 갑자기 해서는 안 되는 장난을 치고 싶었다. 나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조용히 다시 자리에 앉았다.     

  

‘너 임마 한번 당해봐라.’          


그렇게 창문에 비치던 종직이는 점점 작아지다 결국 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 등산 코스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W자 모양의 등산 코스를 일컫는 'W 트레킹'이다. 토레스 델 파이네는 굉장히 인기 있는 캠핑 장소라 최소한 몇 달 전에 예약을 해야 했기에 내가 남미 여행을 준비하면서 거의 유일하게 사전 예약에 신경을 쓴 곳이기도 했다. 우리는 서쪽에서 동쪽 방향으로 이동하기로 계획하고 텐트를 칠 장소만 예약을 했다. *숙소 예약은 산장 또는 캠핑장(설치된 텐트까지 빌리거나 부지만 빌릴 수 있다.)으로 선택 가능.



우리는 서에서 동쪽방향으로 3박 4일 일정으로 계획을 했는데, 첫째 날은 파이네 그란데(paine grande), 둘째 날은 꾸에르노스(cuernos), 셋째 날은 칠레노(chileno)에서 캠핑을 하고 마지막 날 산 정상까지 올라 갈 계획이었다.      


우선 파이네 그란데를 가기 위해서는 공원 입구에서 푸데토 호수 선착장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해야 했다. 공원 매표소에는 우리 버스 말고도 푸데토로 가는 버스가 세 대나 더 대기하고 있는데, 우리 버스가 제일 먼저 도착해 입장권을 샀기에 당연히 뒤에 대기하던 버스들이 더 있을 거라고 판단을 했고, 종직이가 고생을 좀 하다가 그 버스들 중 하나를 타고 금방 쫓아올 거라 믿었다.      


하지만 20분 이상 이동을 하였음에도 따라오는 버스가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우리 버스가 제일 마지막에 출발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식은땀이 흘렀다. 종직이가 버스를 놓치면 나도 공원에 들어갈 수 없었다. 캠핑장비도 나눠서 들고 있었고 공원 입장권도 종직이한테 있었다. 푸데토 호수에 도착하니 역시나 버스 세 대가 먼저 도착해있었다. 배 출발 시간은 십 분도 채 남지 않았고,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짐을 챙겨 선착장으로 벌써 이동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될지 상황 판단이 되지 않았다. 나의 어리석었던 복수를 뼈저리게 반성하며 제발 종직이를 보내달라고 칠레 신에게 간절히 기도했다. 진정한 뉘우침의 울림이 하늘에 닿았던 것일까? 순간 모래먼지를 일으키며 검은색 리무진 버스 한 대가 다가왔다. 창백한 얼굴의 종직이가 환한 빛을 내며 버스에서 내렸다.

       

“형 진짜 너무하시네요. 아침에 제가 잘못한 건 인정하는데, 어떻게 말 꺼내자마자 사람을 버릴 수가 있어요?”   


 아침에 짜증났던 감정이 어느덧 미안함과 안도감으로 바뀌어 멋쩍은 웃음을 몰래 감췄다.



"아니 형 그렇다고 진짜 버리고 가면 어떡해요"


버스 기사가 영어를 못 알아 들어서 세워달라고 했는데도 멈추지 않아서 어쩔 수 없었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로 종직이를 달랜 후 선착장으로 향했다. 푸데토 호수는 빙하가 녹아 생긴 호수로 아름다운 에메랄드 빛깔을 띄고 있었다. 거센 바람이 온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강하게 불어댔고, 물보라가 얼굴을 자꾸 때려 바람막이 지퍼를 끝까지 올리고 후드까지 뒤집어써야 했다.



도착할 때쯤 배 요금을 지불해야 했는데, 미적거리다 줄을 제일 늦게 서는 바람에 배에서 제일 늦게 내렸다. 배에서 제일 늦게 내린 까닭으로 체크인도 제일 늦게 했다. 고로 텐트도 제일 늦게 설치했는데, 바람에 날려가는 텐트를 온몸으로 붙들어 매고서 주변을 둘러보니 이미 다른 사람들은 모두 등산을 떠나고 우리만 남아있었다. 


도착했어요!


기껏  쳐놨더니 뒤에있던  수도에서 물이 나오고 있어 텐트 침수 되서 다시 친다고 늦음. 허허


두시 반이 되어서야 드디어 목적지인 그레이 빙하로 출발했다.     


"걱정하지 마. 4시간이면 충분할 거야.“     


왕복 7시간 한라산 성판악 코스도 4시간 반이면 다녀왔던 왕년의 나였다. 목적지까지 예상 소요 시간이 6시간이었지만 쉬지 않고 걸으면 일찍 돌아와 저녁을 먹을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   

   

설레는 마음에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광활한 대자연에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곳곳에 타다 만 잿빛의 나무들이 듬성듬성 있었는데, 몇 년 전 이스라엘 관광객이 휴지를 태우다가 산불을 내서 산에 있던 나무의 3분의 1 가량이 불에 탔다고 해서 안타까웠다.


이스라엘애들한테 비하면 종직이는 양반이네~


얼마나 늦게 출발을 했는지 꽤 빠르게 한참을 걸었음다고 생각했는데 도무지 앞서 간 사람들의 꽁무니조차 보이지 않았다. 첫 번째 전망대에 도착한 후에야 겨우 쉬고 있는 몇몇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곳에서 돌아갈까 말까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이곳에서 사진을 찍으며 잠깐 휴식을 취했다. 목표인 그레이 빙하까지는 한참이나 더 가야 했는데, 먼저 도착한 한국 사람들은 이 곳에서 그만 발걸음을 돌리겠다고 했다. 피로는 가까워 선명했고 남은 길은 헤아릴 수 없이 아득했다. 포기하고 그만 돌아갈까 망설였지만 ’갈 데까지 가보자.‘라는 오기가 아직은 앞서 나갔다. 늦어 해가 질까 겁이 나 서둘러 걸어가야 했다. 풍경 따위는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푼타 아레나스에서부터 동행한 상균이가 이곳은 물이 맑아 흐르는 계곡물을 그냥 마셔도 된다고 하길래 생수를 사는 대신 기념품 샵에서 텀블러를 하나 샀다. 하지만 산길에는 고인 물밖에 보이지 않았고, 텀블러에 받아온 수돗물은 조금씩 샜는지 이제는 반도 남지 않았다. 그 얼마 되지도 않는 수돗물을 아껴서 나눠 마셨다. 멍청하게 배낭 고리도 없는 것을 사서 어디 메달 수도 없는 노릇이라 한 손에는 등산스틱, 한 손에는 텀블러를 들고 불편하게 걸어갔다.


왜 산장을 예약하지 않았을까? 

왜 캠핑장 텐트를 빌리지 않았을까? 

왜 배에서 좀 더 일찍 줄을 서지 않았을까?

왜 종직이랑 같이 왔을까?(기승 전 종직)    


후회를 하며 계속 걸어가다 우리보다 한참 일찍 출발한 상균이를 만났다.     

    

“얼마나 더 가야 되냐?”       


“형님 다 왔어요. 20분만 더 가시면 됩니다.” 상균이가 대답했다. 


50분을 더 걸어서 드디어 그레이 빙하 전망대에 도착했다.    

       

확실히 힘들게 온 보람이 있었다. 생애 처음으로 마주 본 거대한 빙하는 마치 출렁이는 파도가 마법에 걸려 그 자리에 꽁꽁 얼어 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호수에 두둥실 떠다니는 유빙은 팥이랑 시럽을 뿌려 한 입 시원하게 베어 물고 싶도록 맛있어 보여, 그저 바라만 보아도 저절로 갈증을 가시게 했다.    

 

바람이 안데스의 설산을 흔들어 댔고, 그 하얀 가루가 멀리서 날아와 나의 폐부에 깊숙이 박혔다.     

한 가득 그 차가운 공기를 들어 내쉬어 보았다.     


지구의 시간을 품은 대자연의 광활함 앞에서 나라는 존재는 흐릿하게 지워졌다. 그것을 마주보고 있자니, 나는 우리의 생이 매우 보잘 것 없이 하찮게만 느껴져 쓸쓸함이 일었다.


파도가 그대로 굳어버린 것만 같았던 빙하
냉면에 떠다니는 얼음 같은 유빙


늦은 시간 탓에 전망대에 사람이 우리밖에 남지 않았다. 운치를 즐길 새도 없이 서둘러 캠핑장으로 돌아가야만 했기에 마음이 급했다. 산속에서 어둠을 만날까 겁이 나 지친 몸을 쉬이지 못하고 계속 걸었는데, 어느덧 빽빽한 나무숲 사이로 더 이상 해가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태양의 잔광이 꽤나 밝아 큰 어려움 없이 무사히 캠핑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살았다~~(오후 8시 30분, 총 5시간 30분 소요)


금세 어둠이 깔렸고, 그동안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수많은 사람들이 텐트촌을 가득 매웠다. 같이 출발한 한국 친구들을 만나고 싶었지만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너무 배가 고파 지친 몸을 이끌고 바로 식당을 찾았지만, 이미 문 닫을 시간을 넘겨 더 이상 손님을 받지 않는다고 했다. 창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하얀 김이 올라오는 음식을 먹는 사람들을 처량하게 바라보다 무거운 발걸음을 겨우 떼어냈다.  

   

할 수 없이 점심에 먹다가 맛이 없어 남긴 빵에다 마요네즈를 잔뜩 뿌리고 햄이랑 치즈를 올려 우걱우걱 씹어 먹었다. 아니, 그것은 목구멍으로 쑤셔 넣었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팩 와인을 포도 주스처럼 꿀꺽이며 마셨다. 감히 씻을 생각도 못 하고 옷을 그대로 입은 채 침낭을 이중으로 덮어쓰고 텐트에 누웠다. 


바람이 너무 강해서 텐트 폴대가 휘어져 얼굴을 때릴 것만 같았다. 술기운에 알딸딸해진 틈을 놓치지 않고 잠드는 데 성공했지만, 몇 시인지도 모를 새벽에 잠에서 깨어났다. 다시 자려고 노력했으나 침이 삼켜지지 않을 정도로 갈증이 일어 도저히 잠에 이를 수 없었다.      


뒤늦게 낮에 다녀왔던 화장실이 생각났다. 텀블러를 들고 화장실 세면대에서 물을 받아 세 컵을 연달아 원샷했다.      


‘일체유심조’(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원효대사가 해골물을 마시고 나서야 얻게 된 깨달음을 나는 칠레의 공원 화장실 수돗물을 마시고 이해하게 되었다. 다시 텐트로 돌아오면서 고개를 드니, 무한의 별들이 깜깜한 밤하늘을 이불처럼 덮고 있었다.     



점심 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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