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명산 토레스 델 파이네에서 W 트레킹을 하기 위해서는 '푸에르토 나탈레스'란 마을로 가야 했다.
아침 일찍 눈을 뜨자마자 버스표 예매를 담당했던 종직이에게 예약을 완료했냐고 물어보니, 전날 여자 친구로부터 헤어지자는 통보를 받고 상실감에 휩싸여 예약을 하지 못했다고 했다. 잔소리를 대차게 퍼붓고 부랴부랴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오전 버스표가 모두 매진으로 나왔다.
오후에 그곳에 도착하면 등산 장비를 빌리기도 힘들고, 그렇게 하루만 지체되어도 여행 전체 일정이 다 꼬이게 될 판이었다. 어쩔 수 없으니 다음 버스를 타자던 종직이를 뒤로한 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급하게 버스 터미널로 뛰어갔다.
다행히 10시 15분 버스에 좌석이 남아있었다. 버리고 혼자 갈까 생각했는데, 종직이는 10시 10분이 되어서야 터미널에 나타났다.(결국 이 사건은 다음날 종직이의 운명에 대한 복선이었다.)
토레스 델파이네에서 3박 4일간의 등산을 준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챙겨야 했다. 마트에서 식량과 주전부리 따위를 대충 눈에 보이는 대로 사고는 등산 장비를 빌려주는 렌탈샵으로 갔다.
한국에서 온 손님이 많은지 우리말로 된 가격표가 따로 있었기에 별 어려움 없이 4인용 텐트, 매트, 방수용 바지, 그리고 등산스틱 하나를 빌렸다. 나는 내 사이즈에 맞는 등산화(290mm)가 없어 동네의 렌탈샵을 다 헤집고 다녔는데, 오후 여섯 시가 되니 마을의 모든 가게가 문을 닫아버려 퇴근하는 사장님에게 사정하여 겨우 등산화를 빌릴 수 있었다.
일찍 숙소로 돌아와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한국에서 챙겨온 라면 스프와 칠레산 컵라면의 면을 함께 삶고, 참치마요 주먹밥과 맥주로 저녁을 때웠다.
늦지 않은 시간임에도 투숙객 모두 내일을 대비하여 일찍 잠을 청했기에 우리도 숨죽인 채 침대에 몸을 뉘었다. 항상 허접하고 모자란 우리기에 불안한 마음이 가득했지만, 동시에 또 "어떻게든 되겠지" 란 안일한 마인드로 쏟아지는 졸음에 몸을 맡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