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루스트 효과(Proust Effect)라는 게 있다.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라는 소설에서 등장해서 유명해진 말인데, 해당 효과는 특정한 냄새나 맛을 접했을 때 그 시절의 기억으로 되돌아가는 현상을 말한다.
나에게도 프루스트 효과를 일으키는 몇 가지가 있다. 그 중 하나가 ㅇㅎ열의 음악이다. 나의 십 대 시절의 플레이리스트의 8할을 차지하는 ㅌ이. 가슴을 적시는 먹먹함, 귓가를 간지럽히는 가벼움, 일요일 오후의 나른함 등을 담아냈던 그의 섬세한 감수성... 지금도 머릿속에서 그의 음악을 떠올리면 아스라한 느낌이 솟아오른다. 그의 음반은 대한민국이 내세울 명반이 틀림없다며 자부심마저 가득했건만.
그런 그가 표절을 했댄다. 소식을 믿기가 어려워 관련 영상을 찾아봤다. 하지만 영상을 확인할 수록 그가 표절뮤지션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는 늪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도 그림판에 그림을 그리고 싹 지워본 경험이 있었을 텐데, 내게는 그 소식이 그림판에 공들여 그린 내 인생의 십대 시절이라는 그림을 통째로 지워버리는 것처럼 다가왔다.
인간사에 있어서 소유권 개념은 너무도 중요하게 작동해왔고, 지금은 법으로 사회문화로 그 개념이 겹겹이 보호받고 있다. 하지만 만물이 생겨났을 때 그 어느 것에도 주인이 없었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소유권은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었을까? 나는 이렇게 본다 :
"소유권은 인간이 가진 소유의 욕구를 충분히 인정 해 주겠다는 인본주의적인 몸짓"
뭔가를 소유하는 방법은 크게 보면 두 가지가 있다고 본다. 하나는 외부에서 뭔가를 조달하는 것, 다른 하나는 내가 만들어내는 것. 그 중에 후자는 필연적으로 '자기자신'이라는 재료를 쓰지 않을 수 없다. 내 안에 담아놨던 생각과 배경지식이 내 몸으로 구현된 탐색의 과정을 거쳐 세상에 나오게 된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자아실현의 욕구'마저 충족한다.
그래서 우리는 소유의 욕구과 자아실현의 욕구를 뒤섞은 후 배타적 사용을 곁들인 창작물에 자동으로 권리를 부여하기로 하였다. 그것은 이름하야 '저작권'.
저작권이 법으로 명시된지는 300여 년에 불과하다. 6천년 인류문명사에 비하면 1할도 차지하지 못하는 시간이지만, 저작권은 사회 곳곳에 뿌리를 내리며 그 영향력을 넓혀나가고 있다. 이제 저작권은 사회 구성원들의 인식에 스며들고 시스템으로 자리잡아 사회의 구성원리로 역할을 다하고 있다.
하지만 저작권이 사회의 중요한 원리로 작동하는 현재에도 '이거 좀 갖다 쓰는 게 뭐가 문제라고 그래?'라는 자들이 있다. 대체로 이런 사고방식은 제제를 받는다. 마치 화려한 깃털을 탐낸 까마귀가 다른 새들로부터 질타를 받았던 우화처럼 말이다.
다른 새들이 까마귀를 질타한 직접적인 이유는 그의 탐욕이었지만, 그 밑바탕에는 자신의 깃털은 소중하다는 전제가 깔려있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의 깃털이 가치 없다면 애초에 까마귀를 비난하지도 않았을테니 말이다. 나는 이 시점에 까마귀 우화를 인간사회에 적용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
"우리 사회가 저작권을 존중하는 것은 창조하는 주체를 존중하겠다는 인본주의적 의지를 반영한 것이다."
AI의 등장으로 인간 존재가치가 도전을 받는 요즘이다. 아니, 굳이 AI가 아니라도 역사 속에서 인간은 폭력과 기만, 배신 등으로 인간의 가치를 왜곡했던 숱한 사례를 남겼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 반대편에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위해 행동했던 선례 역시 남겨놨다는 것이다.
시대가 더욱 발전하고 다양해졌으니, 인간의 가치를 지키는 방법도 더 고도화 될 수 있다고 기대한다. 그렇다면 저작권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적극적으로 수호하는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행할 수 있는 인본주의적 가치를 지키는 하나의 몸짓이 될 수 있지 않을까.
** 본 글은 2025 세계 책과 저작권의 날 기념 저작권 글 공모전 응모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