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능을 시각화한 집합체
박찬욱 감독이 일제강점기를 무대로 두 여성의 멜로드라마를 만든다고 했을 때, 모두가 어느 정도 예상했던 점들이 있다. 게다가 원작이 <핑거 스미스>라니. 감독의 장기대로 영화 속 미술과 미쟝센은 더 할 나위 없이 아름다울 것이고, 성애 장면은 파격적일 것이다. 그리고 그 외의 다양한 추측들과 기대 혹은 불안감까지. 이렇듯 시작되기 전부터 수많은 말들을 양 어깨에 짊어진 그 영화, <아가씨>가 마침내 베일을 벗었다. 전작인 <스토커>를 대부분의 사람들의 평가보다 더 좋게 봤기에, 영화를 보기 전 칸에서 쏟아진 평가들에 다소 겁을 먹고 극장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나는 내가 이 영화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아니겠는가. 기대를 충족시킴과 동시에 불안감을 종식시킨 작품이었으니.
이 영화의 1부는 아가씨가 '백작'을 사랑하도록 꾀어주는 역할을 맡은 '숙희'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전개가 매우 빠르고, 특유의 유머를 거리낌 없이 구사하며 보는 이들이 무리 없이 영화 속으로 들어오도록 한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이기 때문에 긴장하고 있던 이들도 어깨에 힘을 빼고 이야기를 따라가게 된다. 말 그대로 1부는 관객과 작품 사이의 촉매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그리고 이 작품의 백미라 할 수 있는 2부가 펼쳐진다. 2부는 그동안 벌어진 일을 아가씨 '히데코'의 관점으로 보여준다. 관객들은 이미 모두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건들을 전혀 다른 시각에서 보게 되는데, 그 흥미로운 변주 때문에 지루함이라곤 전혀 느낄 수 없다. 또 특정 인물이 모르고 있는 정보를 관객들은 알고 있는, 정보의 비대칭성을 이용한 유머는 가히 탁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타고나셨나봐요!).
또한 모두가 예상하고 알고 있었듯이, 이 영화는 매우 야하다. 하지만 그것은 배우들의 나체나 성교행위가 아닌 이미지 자체의 관능성으로부터 기인한다. 이 작품의 모든 장면을 통틀어 가장 도색적인 부분은 숙희가 히데코의 이를 골무로 갈아주는 시퀀스일 것이다. 그 짧은 순간에 서로를 탐색하는 두 눈빛이 마주칠 때 멎는 숨, 팔꿈치를 더듬는 손끝까지. 가히 관능을 시각화한 집합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훌륭한 장면이다.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백 마디의 대사 혹은 극적인 사건 없이 이보다 잘 보여주는 장면이 있을까. 또한 저택을 탈출해 함께 드넓은 평야를 달리는 장면의 아름다움과 문지방을 사이에 두고 다급하게 입을 맞추는 장면의 애절함 앞에선 누구도 둘의 사랑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듯, 훌륭한 사랑영화는 구구절절한 부연설명 없이도 두 사람의 사랑을 납득시키는데 성공한다.
<아가씨>가 사랑 영화로서 이뤄낸 훌륭한 성취의 중심에는 김민희와 김태리라는 두 배우가 있다. 단언컨대 올해의 신인상과 주연상은 이미 결정되었다. 김태리는 첫 작품부터 쉽지 않은 역할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인물을 정확히 이해하고 의문의 여지 없이 표현해냈다. 또한 여배우를 가장 매력적으로 담아내는 것이 박찬욱 감독의 특기란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영화에서 김민희는 실로 놀랍다. 일상 속에서 매우 예민한 아가씨의 모습을 작은 손짓과 말투만으로 표현하고, 사랑에 빠진 이의 표정을 섬세하게 연기한다. 나에게 <아가씨>는 언제까지나 김민희의 영화로 기억될 것이다. 물론 하정우와 조진웅도 언제나 그랬듯 자기 몫 이상의 훌륭한 연기를 보여준다.
그러나 아쉽게도 3부로 넘어오면서 이 작품은 그 자체의 매력을 소실한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계속해서 두 남자의 일그러진 욕망을 보여주는데 집중하는데, 심지어 그 과정에서 두 주인공(특희 숙희)를 잊어버린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숙희와 히데코의 감정을 따라가며 영화를 볼 수 밖에 없는 관객들에게 이 부분은 매우 지루하게 느껴진다. 계속해서 남성들의 비틀린 욕망과 어떻게든 성기만은 지켜내려는 아둔한 모습을 비웃어주려는 감독의 의도는 알겠으나 필요 이상으로 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매력적이란 사실은 부인하기 힘들다. 박찬욱 감독의 작품들 중 가장 대중적이고 친절하며, 유머러스하다. 또한 이 영화의 결말의 아름다움 앞에서는 잠시 넋을 잃게 된다. 그리고 바란다. 진정한 자유와 사랑을 얻은 그녀들이 행복하기를. 맘껏 서로를 욕망하기를.
+)덧붙이자면, 칸에서 상영됐을 때부터 논란이 되고 있는 남성적 시선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성교 장면이 즉흥적 감각의 묘사에만 치우쳐 져있다는 것인데, 바로 그 점이 내가 그들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이유이다. 내가 이 영화의 섹스신을 좋아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두 여성이 욕망의 대상이 아닌 주체가 돼서 성교의 쾌락을 온 몸으로 즐기기 때문이다. 둘의 섹스가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어째서 남성중심적 시각일까? 그런 지적을 하는 사람들은 숙희와 히데코의 섹스의 목적이 쾌락이 아닌 그 이상의 숭고한 무엇이 되어야한다고 주장하고 싶은걸까? 나는 오히려 그런 지적이 진정한 메일 게이즈가 아닐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은 저의 개인블로그(blog.naver.com/hiceo1014)에 게시된 글을 재가공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