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골센터 <카프카>(2019)를 중심으로
관람일시: 2019-10-03 (목) 20:00
발제일: 2019-10-12 (토)
발제자: 조혜인
본 기고문은 2019 한국연극평론가협회 비평워크숍에서 발제되었음을 밝힌다.
1. 들어가며
<카프카>는 2019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의 개막작이다. 그리고 러시아 ‘고골센터’에서 제작한 해외초청작이다. 고골센터는 고전을 바탕으로 연극적, 음악적 실험을 하며 동시대 사회상을 분석하는 작업을 한다.[1] 이러한 작업방식을 바탕으로 <카프카>에서 ‘프란츠 카프카’의 생애를 논픽션과 흡사하게 내용을 전개한다. 한편, 형식적인 측면에서는 모든 것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환영(illusion)에서 벗어나 미니멀리즘, 라이브 핸드헬드(hand held) 촬영기법 그리고 팔로우 스팟의 활용이 돋보인다. 이런 형식적 실험이 카프카의 생애와 부조리에 결합했을 때 어떤 효과를 창출하는가? 그리고 더 나아가 동시대 한국에 어떤 유효한 질문을 던지는가? 본 기고에서는 카프카와 ‘의미 없음’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2. 프란츠 카프카?
공연에 대해서 논하기 전에 간략히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에 대해 알아본다. 그의 전기에 따르면 그는 아주 기묘하게 관습적이면서도 자유롭지 못한 삶을 영위했고, 친구가 별로 없는 공무원이었으며, 세상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예속적인 가족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에로틱한 관계에서 성공한 경험도 없었다. 모든 것을 패 하나에 걸었던 금욕주의자, 고도의 전문성을 갖춘 예술적 업적을 위해 말 그대로 남은 생을 바쳤으나 그 성과를 한 번도 누려서는 안 되었던 금욕주의자였다. 그는 가톨릭 국가였던 오스트리아에 사는 유대인으로, 독일어를 쓰는 체코인으로 살아가야 했다.[2] 그에대한 인상깊은 예화가 하나 있다. 그는 어떤 아이를 문학으로서 위로한적이 있다. 아끼는 인형과 이별을 해서 슬픔에 빠진 아이를 위해 편지를 써서 위로 할 만큼 그의 일상과 문학은 일치했다. 편지 속에 인형의 삶을 창조해서 작품을 쓰듯이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고 이 픽션을 어떻게 마무리 해야할지도 고민했다. 자신이 쓴 편지의 결말로 인해 아이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화로 보아 카프카는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이며,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명확히 아는 자 같다.
3. <카프카>: ‘부조리’와 ‘의미 없음’에서 발견되는 의미
공연장에 입장하면 프리셋이 눈에 띈다. 다운스테이지에는 공연의 플롯이 진행될 공간이 하얀 벽으로 세팅되어있다. 무대 한가운데에는 마이크가 있고, 하수 한편에는 악기들과 ‘엘립소이드 줌’으로 추측되는 팔로우 스팟이 설치되어있다. 반면에, 업스테이지에는 분장실이 노출되어있다. 무대 위 분장실의 존재 그 자체로 <카프카>는 공연이라는 환상을 철저히 거부한다. 분장실은 ‘조리’로서 생각해보았을 때, 무대 뒷편에 숨겨져 있어야 하는게 아닌가? 하지만 그것을 거부했을 때, 카프카의 부조리함이 언어를 초월해 무대 그 자체로 드러난다. 1막에서는 카프카의 유년시절부터 약혼, 그리고 약혼녀와의 결혼 취소까지 이야기가 전개된다. 카프카를 집중하는 팔로우 스팟으로 인해 카프카만이 가진 고립과 내면의 세계를 상상하게 한다. 무대전환이 일어나며 2막은 ‘환희의 찬가’로 시작되고 공연은 ‘테네시 왈츠’로 마무리된다. 2막에서는 음악과 배우들의 움직임이 부각되며 1막의 직선적 플롯과는 다른 이야기 전개 형식을 취한다. 인물들이 마이크를 잡으며 자기이야기를 한다. 또한 수많은 의미들을 창발하는 그의 텍스트가 무의미하게 타버리는 장면을 통해 무의미의 의미를 생각해본다. 실제로 카프카의 작품은 그의 친구에 의해 가치를 인정받아 불에 타지 않았다. 카프카가 전쟁과 삶의 고통 속에서 창조해낸 무의미함 그 자체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 의미는 독자 개개인마다 다를 것이다. 또한 본 공연의 클라이맥스는 카프카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이다. 죽음 직전까지 그에게 따라붙는 질문들이 있다. “당신은 독일작가라고 생각합니까?”, “당신은 신을 믿으십니까?” 이런 것들은 아마도 카프카 스스로가 평생에 걸쳐 내면에 던져온 질문들이다. 균열난 정체성에 대한 해답의 갈구이자 고통 속에서 신을 간절히 찾았음을 암시한다. 정체성을 확립하는데에 느낀 무의미함과 삶의 연약함은 결국 생의 마지막까지 ‘자신은 누구인가’에 대한 의미를 찾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공연은 아쉬움을 내재하고 있다. 러시아어로 진행되는 공연에서 자막은 한국 관객에게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자막 실수가 매순간 발생했다. 그리고 카프카를 친숙히 아는 관객과 그렇지 않은 관객 사이의 격차도 있다. 정확도가 떨어지는 자막으로 인해 그 격차는 더욱 벌어진다. 그래서 <카프카>는 관객에게 카프카에 대해 알고 봐야했다는 심리적 압박감을 전한다. <카프카>는 마치 우리나라 의식의 흐름 기법의 대표 문인인 ‘이상’의 삶과 글쓰기를 체코의 어느 대극장 무대 위에 올려놓은 것과 비슷하다. ‘대한민국 사람들은 과연 카프카에 대해 어느 정도의 거리감을 갖고 있을까?’에 대한 리서치가 부족하다. 공연으로부터 관객과 카프카와의 인격적 만남이 없다면 그저 화려한 테크놀로지와 정교한 음악이 가미된 미장센의 나열일 뿐이다. 세레브렌니코프 연출이 아무리 카프카의 언어를 엄선되게 골랐다고 하더라도, 한국이 카프카를 어느정도 이해할지 염두해두었다면 새로운 연출전략이 생성될 수 있었을 것이다.
4. 나가며
카프카는 ‘의미 없음’에 대한 질문을 남겼다. 이는 역설적으로 우리가 카프카의 삶 가운데 새로운 의미를 찾아낼 수 있도록 한다. 기호로부터 저항한다는 의미도 되겠지만, 관객에게는 카프카의 삶을 무대화 하는 과정에서 생성된 기호 그 자체가 주는 거대한 압박을 가지게 한다. 그러나, 카프카가 창조한 ‘의미 없음’은 본질적으로 그 자신의 내면에 뿌리깊게 자리잡아온 정체성의 균열, 불안 등을 세상 밖으로 표현 할 수 있게 했다. 비로소 ‘의미 없음’이 가진 의미로 인해 현재까지도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을 수 있는 작가로 자리매김 한다.
미주
[1] 2019 서울국제공연예술제 프로그램북
[2] 라이너 슈타흐 지음, 정항균 옮김,『어쩌면 이것이 카프카』, 2017, 저녁의책, 12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