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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혜인 May 12. 2021

유령의 논리: 삶과 죽음의 비논리 사이에서

<죽음의 집> @고양 아람누리 새라새극장

관람일시: 2021-04-30 (금) 20:00

장소: 고양 아람누리 새라새극장

출연 배우: 이강욱, 백석광, 심완준, 문현정


본 리뷰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본 공연 <죽음의 집>은  5월 초 <시소와 그네와 긴줄넘기>로도 활발히 연극작업을 펼쳤던 김민솔 기획자와 고양문화재단이 만나 '새라새극장'에서 상연되었다. 새라새극장은 정발산역 3번출구에서 내리면 가깝게 걸어갈 수 있는 극장이다. 서울 사람인 필자에게 고양의 극장을 찾아가는 경험은 낯설지만 새로운 모험이었다. 고양 현지인에게 새라새극장은 어떤 의미일까?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를 연상시키는 외관에, 대학로를 벗어난 점에서 고양 사람들의 연극 접근성이 활성화 되리라 기대해본다. 무엇보다 이 극장은 기본적인 프로시니엄 형태에 충실하다.


어느 집의 거실, 이른 새벽 혹은 밤을 연상시키는 퍼플-블루 톤의 그라데이션 조명이 전체적으로 깔려있다. 무대 중앙엔 곤색 소파가 놓여있고, 상수 벽에 작은 원형시계가 걸려있다. 객석과 가까운 하수쪽에는 등퇴장구가 조그맣게 나있다. 이렇게 프리셋을 감상하는 사이, '삐삐- 삐삐-' 반복적이고 미세한 리듬의 음향이 객석을 파고든다. 새소리, 종소리, 물소리와 함께 공연이 시작된다.


사진제공: 아어(ⓒ이강물)


방 안에 홀로 있는 '상호'의 불안, 초침소리에 시계를 떼어버린다. 이내 친구 '동욱'이 등장한다. 이들은 곧 '산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사진제공:  서울연극협회 (ⓒ Fotobee 양동민)


"사는게 별게 없어" -동욱

동욱은 심드렁하게 자신의 삶에 대해 말하지만, 상호는 베란다 틈을 자꾸만 확인한다. 상호의 기이한 행동은 이뿐만이 아니다. 동욱이 상호의 몸에 손을 대려하자 기겁을 하며 피하고, 동욱에게 밖에 나가선 절대 안된다고 한다. 이내 상호는 더욱 비이성적인 발언을 한다.

"동욱아, 내가 죽었다고." -상호
"나, 내가 죽었다는거 알아." -상호


사진제공:  서울연극협회 (ⓒ Fotobee 양동민)
사진제공:  서울연극협회 (ⓒ Fotobee 양동민)

이런 믿을 수 없는 상황은 친구 영권과 제수씨 문실이 등장하며 더욱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된다. 이들도 부부싸움에 홧김으로 죽음을 선택했다. 죽은 이들도 이 상황이 불안하고 납득이 안가는 마당에, 어떻게 산 사람들이 죽은 사람을 이해 할 수 있을까? 본 공연에서는 죽은 사람들도 산 사람처럼 술을 마신다. 그리고 산 사람이 살아있다는 걸 알듯이, 자신들이 죽었다는 걸 안다. 죽은 이들은 살아있는 동욱을 향해 치열하게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왜 사세요?" -문실
"동욱씨는 뭘 위해 사세요?" -문실


동욱은 질문을 받을 때 마다 확고한 대답을 내놓지 못한다. 삶에 대한 아주 기본적이고 철학적인 질문들이지만 그만큼 답하기 쉽지가 않은 것이다.

이처럼 상호의 공간이라는 '삶과 죽음 그 사이의 모호한 경계'에서 죽은게 죽은게 아닌 듯, 산게 산게 아닌 듯한 존재들의 논리를 거스르는 대화들이 이어진다. 특히, 무아지경으로 상호를 이끄는 댄스 장면은 죽음 이후 세상살이의 헛됨을 모두 풀어버리는 굿판과 같은 광기가 엿보였다.



<죽음의 집>의 아이러니가 폭발하는 순간은 문실이 중간에 집을 나갔을 때 부터 시작된다. 여기서부터가 상호의 집이 가진 '죽음의 법(the law of death)'이 드러나는 대미다. 사람들은 다시 상호의 집에 되돌아온 문실을 알아보지 못한다. 심지어 생전에 남편이었던 영권마저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다. 남은 자들은 죽은 사람이 집에 왔다는 것만 인지하게 될 뿐, 그 사람이 누구인지 곧바로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죽음과 죽은자는 애석하리만큼 쉽게 잊혀진다는 삶의 무감각함을 부조리한 반복을 통해 보여준다.


살아있는 동욱도 나간다. 필자는 이 지점에서, "과연 동욱이 진짜 살아있는 사람일까?" 의문을 던져본 채로 관극을 이어갔다. 극중 설정에 너무 쉽게 믿어버리는 순진한 관객이 아닐까 긴장의 끈을 단 한 순간도 놓을 수 없었다. 상욱 혼자 집에 남아있자, 다시 그의 불안이 공간에 엄습한다. 상욱의 심리와,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공간이라는 점은 조명의 변화를 통해 관객으로하여금 감각하게 한다. 이 때, 동욱이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상욱은 동욱을 알아본다.


사진제공: 아어 (ⓒ이강물)


집 밖에 다녀 온 동욱은, 극의 시작과는 대조적인 심리상태를 보인다. 과연 동욱에겐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동욱은 상욱의 종용에도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는다. 왜 상욱과 동욱의 입장이 이토록 바뀌었을까? 동욱은 잊혀지지 않았다. 무엇이 동욱을 이토록 두려워하게 했을까? 동욱은 밖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생생하게 살아있는 동욱은 '죽음' 그 자체를 보고 온 것이 아닐까?


삶의 리듬과같은 시계소리가 들려온다. 결국 상호는 집 밖으로 나갔다가 들어온다. 집의 법칙대로 동욱은 상호를 알아보지 못한다. 마치 낯선 사람이 되어 두 사람은 대화를 이어나간다. 그러나 동욱은 상호를 잊지는 않았다고 한다. 상호는 집을 떠나고, 동욱은 남아서 집을 정리한다. 시계를 원래 자리에 돌려놓는다. 열려있는 베란다 문을 닫고 퇴장한다.


마지막 상호의 모습에서 완전한 죽음의 세계로 향하기 전, 삶의 경계를 향한 무언의 눈빛이 어떠한 단절감, 결단, 더이상 되돌릴 수 없음 등 무수한 상상력을 쥐어주며 공연은 막을 내린다.


사진제공:  서울연극협회 (ⓒ Fotobee 양동민)


본 공연은 유령들에게 육신을 입혀 산 자와 술도 마시고, 서로 만질 수 도있는 존재로 만들었다. 상호가 생전에 그리스에서 사온 술을 죽은자와 산자가 계속해서 마시는 장면또한 매우 디오니소스적이어, 로고스(logos)에 대항해 아이러니하기 그지 없다. 또한 유령은 죽었지만 살아있는 존재로써 통상적인 삶과 죽음의 이분법적 논리를 해체한다. 이는 프랑스의 해체주의(deconstruction)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가 유령에 관심을 가진 이유이기도 하다. 유령의 논리는 데리다를 사로잡았다. 유령은 감각의 방식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현상함과 동시에 현상하지 않음으로 결정불가능성(undecidability)의 가치를 보여 준다.1)


<죽음의 집>에 나와있는 모든 사건들은 논리로 설명하기 어렵고, 삶과 죽음 사이의 이분법적으로 나눠질 수 없는 공간에서 '죽음 이후'의 시각으로 새롭게 구성된다. 데리다의 해체(deconstruction)가 지향하는 바와 같이, 단순한 파괴(destruction)가 아닌 새로운 구성(construction)을 이끌어낸다. 공연을 통해 삶이 얼마나 한 끗 차이로 믿지 못할만큼 허망해질 수 있음을 볼 수 있고, 비록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는 죽음 후 직접적으로 삶과 가치관의 변화를 겪을 수 없지만,  어떻게 이런 변화들이 보이는지를 섬세한 긴장과 헛헛한 유머로 쥐락펴락 되는 자신을 만날 수 있다. 글을 마무리하며, 삶도, 죽음도 그 무엇도 쉽게 결정불가능한 인생의 한 단계라는것을 무대 위의 유령들과의 만남을 통해 다시한번 상기해본다.


미주

1) 마틴 제이(Martin Jay), <눈의 폄하 Downcast Eyes>, 2019, 서광사, 6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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