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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파랑 Oct 29. 2016

대학의 길목에 서서 (하)

<두장의 타임라인> 10월 30일

LG 트윈스가 가을야구에서 한국시리즈 문턱에서 좌절을 했습니다. 1994는 끝내 응답하지 않았지요. 그렇지만 별로 중요하진 않은 가을입니다. 연이어 터지는 대통령의 이야기는 조선말의 역사소설을 되돌리는 듯 하루하루가 다이내믹하게 이어지고 있으니까요.  


86년 서울

1986년 아시안게임이 독재의 마지막 불꽃이 되어 모든 시민들의 관심을 집어삼켰습니다.  라면만 먹고 뛰었다는 육상의 장거리 여자 육상 3관왕 <임춘애 선수>, 에어로빅으로 유명한 아시아의 스프린터 <장재근 선수>, 아시아의 인어 자매 중 동생인 수영의 <최윤희 선수>, 탁구의 만리장성을 넘은 <유남규 선수>, 복싱의 12 체급 모두 석권....  뜨거운 여름의 끝자락에서 저는 휴학계를 내고 입영을 기다리던 중이었습니다. 지금은 자취가 없어졌겠지만 종로 3가의 <에쿠우스>라는 레스토랑에서 차와 음식을 서빙하는 일을 하고 있었고 간간히 TV를 통해 <아시안 게임>에서의 한국 선수들의 선전을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제일 싫은 과목 반도체

<떠오르는 학과>라고 했던 <전자공학>이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던 저는 당시에 1학년은 교양과 기초과목은 그런대로 성적을 유지했지만 2학년 전공 들어가면서는 조금씩 흥미를 잃어 가는 중이었지요. 당시의 교수님들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전자공학 세상에서는 첨단에는 많이 약하셨던 것 같습니다.  <트랜지스터> 시대에 억센 일본 영어 발음으로 <진공관>을 강의하신 교수님도 계셨고, 프랑스에서 공부하신 교수님은 틈만 나면 낭만에 젖어 소설 <폭풍의 언덕>이나 <제인에어>등으로 자꾸 샛길로 빠지는 강의 등이 있었지요.  학과에서는 당시에 첨단 <반도체> 기술을 가르치기 위해 미국에서 공부를 하신 젊은 교수님이 영입했습니다. 그분의 폭탄과 같은 미국식 수업과 시험으로 <Device Physics, 물리전자> 라는 과목에서 낙제 학점을 받게 됩니다. 지금 <반도체> 회사에서 수십 년을 종사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반도체 기초 과목이 당시에 알량하게 받고 있던 학비 보조금을 냉정하게 앗아가벼렸던 과목이었던 것이지요.


이강석 & 정유라

당시의 아시안게임에서도 <승마> 종목에서 금메달 3개를 비롯해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지만 승마용 말은 고사하고 한 달 말 운영비 400~500만 원은 귀족이 아니면 누가 이 스포츠를 접할 수 있을까요?  자유당 정권의 이기붕의 아들인 1 공화국의 황태자 <이강석>도 당시에 서울대 편법 입학으로 물의를 일으키고 버티다가 결국 자퇴를 하게 되었고, 지랄 같은 2016년의 대한민국의 넘버 2 <정유라>도 이화여대에 인천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라는 타이틀로 부정하게 입학을 했고 결국 자퇴를 하겠지요.


에쿠우스의 추억

제가 일하던 레스토랑 <에쿠우스>라는 단어의 의미는 <기병대가 타는 말> 뜻하는 라틴어였고, 기억하는 것이 당시에 동일 이름의 연극도 공연도 도심 곳곳에 포스터로 발견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 곳의 구조는 1층은 평범한 경양식집, 2층은 당시에 유행한 커다란 <DJ박스>가 설치된 젊음의 공간이었습니다. 손님이 들어오시면 점잖은 어른들은 1층으로 안내했고, 애들은 알아서 2층으로 올라갔습니다.  2층에 날렵한 DJ들은 당시 유행하던 디스코 음악 <Joy의 Touch by Touch>나 <모던 토킹의 You're My Heart You're My Soul> 등의 레코드 판을 올려놓고 현란한 손짓 몸짓으로 고삐리들의 환호를 받았습니다. 공부하기 싫은 여고생들은 방과 후 이곳에서 커피 한잔 시켜놓고 <죽 때리기>를 하다가 시간이 적당히 어두워지면 들고 온 방을 에어컨 구석에 던져서 숨겨놓고 근처의 <국일관> 나이트클럽에 가서 노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애들이 불러서 가면 담배 심부를 시켰고, 그러면 카운터에 있는 <솔담배>를 <에쿠우스> 문양이 새겨진 업소용 성냥과 같이 가져다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호스티스와의 만남

규모가 워낙 있던 레스토랑이라서 애들 커피 팔아서는 이윤이 만족스럽지 못했고 지배인은 2층 한켠에 <Room>을 만들어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됩니다. 이 신사업의 일환으로 당시에는 <호스티스>라고 부르는 아가씨를 한 명 고용했습니다. <술집여자>라고 하는 사람은 문학작품이나 영화에서나 보았지 이렇게 직접 대면하니까 신기하기도 하고 불쌍해 보이기도 하고 뭐 그런 심정이었지요. <채수아>라는 가명가진 이 친구는 술을 잘 먹지 못하는 친구라서 어쩌다가 접대가 길어지는 날에는 화장실에 오물을 쏟아내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 왜 그랬는지 잘 몰랐지만 저는 그 뒤처리까지도 했었고 지금 생각하면 연민의 감정이 많이 있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이 친구는 예쁘장하게 생겼지만 정말 싼티가 난다고 하나? 뭐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짙고 천한 화이 정말 잘 어울리는, 그래서 가식이 없고 직설적이어서 오히려 매력도 있었고....  

Room은 제 담당은 아니었지만 손님 접대하러 Room을 오가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것을 저는 너무 힘들어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 동생처럼 저를 친하게 대해주던 <카운터누나>는 제 마음을 눈치채고 <술집여자>에 제 마음이 동하는 것을 말리고 자제를 시켰던 것 같습니다.


블랙박스에서의 일용직

그러니까 꼭 30년 전 10월이니까 요맘때겠군요. 상봉터미널에서 포천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귀에 꽂은 <마이마이>를 통해 나미의 <슬픈 인연>이란 곡을 들으며 얊고도 질기지 못한 가슴을 달래고 있었지요. 포천 일동은 보병 8사단이 주둔하고 있는 곳입니다. 서울의 유흥 문화에 잘 적응하지 못한 서울촌놈은 일동 버스터미널 근처의 <블랙박스>라는 레스토랑의 웨이터로 다시 일용직을 구했습니다.


티켓다방

이곳 사장님의 경영 철학도 특이해서 애들이 어쩌다가 오면 주민증을 보자고 하면서 불쾌하게 해서 실드를 쳤습니다. 동네 유지분들이나 군장교들의 저녁 유흥에 최적의 분위기를 제공하였습니다. 상주하는 접대부는 없었지만 당시 유행하던 <티켓다방>을 통해 도우미들이 조달되는 시스템이었던 것이지요. 고객이 주문을 하면서,

"명다방에 미스박에게 커피 좀 시켜 쥐."

라고 하면 주문 내역 전달과  함께 사장은 명다방에 전화를 하겠지요. 커피값과 별도의 티켓 비용은 시간당 계산하고 지불해야 합니다.


밤에 피는 장미

술을 따르고 비위를 맞추는 <작부> 들은 동서고금, 서울/지방을 가리지 않고 늘 우리의 <어두운 밤에 피는 장미>였습니다. 조선시대의 기생이 벼슬이라 하지만 그것이 황진이든 작부든 호스티스든 도우미든 그 본질이야 얼마나 다를 까요? 그리고 성탄이 오기 전 입영통지서를 받아 들었고, 이듬해 일찍 그 추운 논산훈련소로 가기 위해 머리를 밀었습니다. 자부하건대  당시에도 저는 훌륭한 노동자였기에 사장은 저와의 이별을 못내 아쉬워 했던 것 같습니다. 성대한 이별주를 나누었고 답례로 떠나면서 저는 그 사장님이 그렇게 아끼고 좋아했던 <블랙박스 속의 블랙박스> DJ박스에 휘트니 휴스턴의 LP판을 선물했습니다.


변해가는 대학

80년대의 일류대학의 일류학과에는 서울 출신 40 %,  경상도 출신 20~30%,  전라도 출신 10~20%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어떨까요? 외고, 자사고, 영재고를 중심으로 서울 출신들이 대부분이 아닐까요?  그들은 철저하게 훈련받은 집단입니다. 사교육으로 말이지요.  돈은 학원을 지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정부가 말하는 <프라임 사업>은 대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재를 늘리는 사업입니다. 어떤 분은 요즈음의 대학이 <대기업의 포주>라는 표현을 하십니다. 대학은 지성의 상징이고 우리나라 최고의 지식 집단이여야 하는데 말이죠.


빠르지 않은 시국선언

박근혜 씨는 사퇴를 해야 합니다. 제도권에서 정치세력들이 지지부진할 때 지식인들은 앞장서야 합니다. 80년대 일류 대학생의 부모님은 노동자, 농민이었지요. 정치, 사회의 부조리로 발생하는 피해는 고스란히 서민들이  짊어지고 가야 했고 그것은 우리 아버지 어머니의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자본가의 자녀들은 정의, 연대, 상생이란 단어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30년 전 서울대 박종철 군과 연세대 이한열 열사의 성스러운 희생을 후배들은 어떻게 계승하고 있나요? 금일 어렵게 발표된 서울대 시국선언문을 수정하는 해프닝이 있었지요? 선봉에 서지 않았는데 선봉이란 표현을 썼다는 이유에서요.


지식인의 자질

미국 총기 협회 (NRA)가 막강한 로비력으로 총기 소지 금지법을 막고 있는 것은 잘 알고 있지요. 총기의 잘못된 사용으로  하루가 멀게 총기난사 사건이 발생하고 있는데도 말이죠. 지식도 잘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갖추어야지요. 잘 사용하게 하는 것이 인성교육입니다. 대학이 지금처럼 자본이 원하는 스펙에 치우칠 때, 이 것은 그냥 매출을 늘리기 위해 술 따르고 손님 비위 잘 맞추는 능력 있는 <호스티스>를 양성하는 것이고, 이렇게 잘못된 시스템이 지속되면 돈이나 성공을 위해 자신의 양심은 돌아볼 수 없는 <우병우>와 같은 괴물이 다시 또 나오지 말란 법이 없습니다.


지정한 지식인이

이제 곧 대학생이 될 아들에게 아빠의 복잡한 심정을 전하는 것이 다소 무리겠지요. 작년에 딸 이이와 자기소개서 쓰면서 작성했던 마지막 마무리 문장을 다시 상기해 봅니다.

'진정한 지식인이란 그 지식을 진정으로 나눌 수 있고 배려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장호 감독의 <별들의 고향 >. 1974년
서울대 시국선언. 2016년 10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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