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장의 타임> 10월 22일
이제 한 달도 남지 않은 수능에 그냥 집안은 엄숙해져 가는 분위기입니다. 맑고 깊어 가는 가을 하늘 아래 주변에 놀자고 하는 사람들은 많은데 정체를 모를 책임감에 겨우겨우 설악산 1박 2일만 일정으로 잡아 놓고, 집사람 눈치 보며 조신하게 살아가는 중년의 가을날입니다.
70%가 넘는 대학 진학률. <대학교> 그 정체가 뭐길래 이렇게 우리의 삶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지? 무엇 때문에 우리는 이런 사회적 딜레마에 빠져 있는지 서글픈 현실입니다.
80년대 초반에 대학교내 캠퍼스는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덕지덕지 붙어있는 대자보와 바닥에 시커멓게 그을린 화염병 자국들... 툭하면 휴강에 데모에 췌류가스로 뒤덮인 전두환 정권의 캠퍼스 풍경입니다. 왜 그렇게 열정적인 학생들이 많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한 저는 휴강이 되면 어김없이 발걸음을 도서관을 돌렸습니다. 당시에는 시위를 하면 전경들은 학내로 진입하지 못했는데, 어느 순간 학내에 전경들이 진입하게 됩니다. 시위에는 거리가 멀었던 공대생들 사이이도 분노의 기류가 흘렀고 어느 날에는 또다시 <시위 참여>와 <수업 참여>를 놓고 공대 앞 원흥관 공터에서 난상토론이 벌어졌습니다.
"지들이 뭔데 학교까지 들어와? 시국이 이런데 한가롭게 수업에 참여하는 것이 맞아?"
복학생 형이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렇다고 수업을 빼먹는 것은 그렇지 않나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차분하게 <우리 학과 일등>이 반론을 제기합니다.
결국은 어떻게 할 것인지 입장대로 서보기로 했고 저는 그 <우리 학과 일등> 뒤에 조용히 섰습니다.
엄흑한 독재의 시절에 수많은 대학생들이 <교내>에서는 물론이거니와 <노동현장> <교육현장>에서 독재와 싸우며 민주주의를 회복하려는 386세대의 눈물겨운 노력들. <전학련> <삼민투위>등의 조직을 중심으로 학생운동이 불꽃처럼 일어났던 시절. 1985년 <미국문화원 점거 사건>은 한국군 작전통제권을 보유한 미국이 공수특전단과 보병 20사단을 광주에 투입한 사실에 대한 사과와 독재정권에 대한 지원 중단을 요청한 사건이었고, 나흘간의 점거 농성 이후에 모두가 구속됨과 동시에 <민청련>을 사건의 배후로 지목한 당시의 정권은 <김근태 의장>을 남영동 고문실에게 고문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정지용 감독의 <남영동 1985>는 바로 이 사건을 영화화한 것이지요. 그리고 1987년 <이한열 열사>의 죽음을 발화점으로 우리는 또 다른 역사의 한 페이지를 <6월 항쟁>으로 완성하였고,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넥타이 부대까지 동원한 이 역사적 사건으로 <대통령 직선제>라는 소중한 결과를 만들었던 것도 이 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학교 캠퍼스는 봄에는 목련이 여름에는 장미가 짙은 교정을 품고 있습니다. 흑백으로 어설프게 복사된 각종 유인물은 초등학교 때 자주 했던 숙제인 <북한전단> 주워오기의 그 내용과 이미지는 별반 다를 것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나마 공대는 상대적으로 시위에서 자유로웠지요. 수업이 없는 날은 늘 췌류가스와 목련꽃 향기가 칵테일처럼 섞여있는 냄새를 맡으며 광장을 지나 도서관으로 향했지요. 그리고 그 결과 이렇게 잘난 기업에 취업하고 가난하지 않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려운 세상을 살면서 늘 저는 <무임승차자>였습니다. 그래도 뭔지 모르는 사명감에 어떤 모임이건 술 먹고 파장하는 노래는 언제나 <님을 위한 행진곡>이나 <아침이슬>이었지요.
초등학교 시절 중학교 시험을 걱정했지만 이내 시험 제도는 없어졌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큰 아들 <지만> 덕분이지요. 대학교 갈 때쯤 되니까 또 <사교육 금지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막말 파문 윤상현 의원의 전 부인이자 전두환 씨의 따님 <전효선>씨 덕분이라는 이야기가 있지요. 60만 명의 사교육을 막고 본인은 사교육의 힘으로 서울대에 입학했다는 의혹이 있습니다. 덕분에 저는 대학 진학 시 자본으로부터 차별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등 노동현장에서 수없이 희생된 분들의 희생으로 또 무노조 회사에서 <근로자의 권리>를 보장받으며 지금까지 편하게 살아오고 있습니다.
<박지만>과 <전효선>씨가 촉발시킨 한국의 교육개혁은 원인이야 어찌 되었던 저처럼 돈 없는 가난한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면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제공한 것 같습니다. 당시 대학은 지방의 가난한 수재들이 서울의 대학으로 진출하고, 노동자와 농민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대통령의 따님과 같은 <최유라>씨의 대학 진학 과정은 더 이상의 교육에 대한 판을 바꾸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그녀가 이화여대에 입학한 방법은 제도의 개혁이 아니었고 그녀가 입고 등장한 화려한 승마복이었던 것입니다. 돈으로 키워진 아이들의 천재 소리를 들어가면서 대학마저도 점령해 버린 것이 아닐까요? <자사고> <특목고>가 아니면 웬만한 학교의 수시 원서도 넣어보지 못하는 더러운 계급적 학교 구조에서는 아이들에게 <우리>라는 것과 <대의>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기에는 너무도 각박한 환경인 것은 분명합니다.
이화여대 <평생교육단과대학> 사건에 이어 <정유라>씨 학사 부정에 대한 이화여대 학생들의 시위는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학원의 풍경인 것 같습니다. 어렵게 진흙에서 버스의 바퀴를 들어낼 때 멍하니 보고 있다가 마른 길로 올라와 시동을 걸 때 유유히 버스를 타고 다녔던 제가, 이렇게 난잡한 시국에 행동하지 않는 젊음을 논하기에는 자격 미달입니다. 그렇지만 그 당시에 뜨겁게 젊음을 불살랐던 386의 패기들도 어느덧 속물 정치인들이 되어 언론에 추잡한 언행을 내뱉기도 하고 이러한 기울어진 운동장이 만들어지는 동안 모두는 누군가가 하겠지 하는 태도로 진흙 속의 수레바퀴를 바라만 보고 있으니까... 적어도 그들은 변했고 나는 변하지 않았다는 위안은 갖게 됩니다. 검은 선글래서와 마스크를 쓰고 나타난 그녀들의 시위는 왠지 부자연스럽고 자신감이 떨어져 보입니다. 80년대 <6월 항쟁>을 이끌었던 젊은이들의 패기와는 거리가 먼 모습입니다. 그건 그 시위의 화두가 <세월호> <위안부 합의> <최저임금> 그리고 직격적 췌류탄에 사망한 이한열 열사처럼 물대포에 명을 달리하신 <백남기농민> 등의 대의적 이슈가 아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학교의 품격>을 떨어뜨림에 반발한, 다소는 개별적인 <소집단>적 행동에서 그 동력이 가동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2014년 여론 조사의 결과에 따르면 '우리의 자식이 우리보다 잘 살지 못할 것이다'라는 명제에 동의하는 답변이 45%에 육박하는 결과를 얻었습니다. 이는 1990년대의 여론 조사 5%에 비해 급격하게 늘어난 결과이고, 아마 2016년 지금은 절반을 상회하는 결과가 얻어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의 자식들이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윤택하지 못한 사회, 그렇다면 정신적으로는 더 풍요하고 발전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면 꼭 그렇지 많은 않다고 생각이 듭니다. 가난한 우리들의 부모들은 우리에게 많은 정신적 토양을 제공했음이 분명하지만, 부자아빠는 가난한 아들에게 지금 과연 어떤 것으로 토양을 제공하고 있는 것일까요?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도 후세에게 토양을 제공하지 못하는 지금의 기성세대는 분명 시대의 죄인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아들에게는 정말 중요한 시기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정말 어떤 대학을 가는지가 중요해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대학에 가든지 수많은 자본의 힘으로 키우고 선발된 대학생들이 <우리>라는 콘텐츠를 잃어버린 그리고 정신적으로 가난한 상황에서 <취업의 공포>를 극복하고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지? 그들은 아빠 세대의 젊은이들이 <정치적 독재>에 맞서서 싸웠던 것처럼 <자본의 독재>에 맞서고 행동할 수 있을지 걱정스럽습니다. <회고록>이 정쟁이 되고 기사가 되는 아이러니한 세상에서, <무임승차>로 달리는 대한민국에서 편하게 살았던 아빠의 <회고록>를 적어 보면서 진흙 속의 수레바퀴를 밀어내기 위해 양말을 벗어던지라고 주문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다른 생각일까요? 세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아빠의 무관심>이 정말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 요령인지....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하편에서 고민을 이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