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등 불안감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1]
[마태복음 6장 34절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골똘히 생각해봐도 여전히 어렵습니다.
저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존재로서 자라갈 수 있는 대단한 축복의 신분임을 잊고,
자주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를 기르시는 본 뜻의 수준과 존재가 아닌,
도덕적 행위 여부로 자신과 타인을 밀어넣는 습관,
수준을 낮춰, 생각하기 편한대로 흘러가려는 태도가 스스로에게 더 익숙합니다.
가까운 자녀와 남편에게도 그런 패턴으로 잔소리를 합니다.
저는 은연 중에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는 이유가 아버지 하나님이 다 “책임”져 주시기 때문에… 다 잘 될 거니까… 로 마무리 되기를 바랬던 것 같습니다.
“책임”이라는 단어는 정말 무겁게 느껴지고 회피하고 싶은 것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나의 현실적 내일을 평탄케 해주시길 바라는 기대와 달리 말씀은 ‘내일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하면서 내일도 염려와 괴로움이 있을 것임을 시사합니다.
그런데 어째서 내일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인지요… 어차피 내일일은 통제권 밖에 있으니까 그런 걸까요?
오늘 이어폰을 끼고 박영선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며, 산책을 나서서 저만치 보이는 신호등을 확인합니다. 새삼 제가 불안이 굉장히 높은 사람임을 인지합니다. 신호등이 건너라는 신호인 초록으로 바뀔까봐 걸음을 재촉하면서도 마음은 불안으로 뛰어가고 있습니다. 고작 신호등인데 말입니다. (네 저는 불안이 꽤 높은 사람입니다. )
그래서 고개를 잠시 숙이고 걸어가며 생각합니다. 왜 불안하지? 무엇을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지?
신호등을 건널 때 늘 멀리서 이미 초록으로 바뀌어 사람들이 건너고 있으면 오히려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어차피 다음 신호에 가야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주 사소한 일이지만 일종의 포기같은 감정이 어려있습니다.
걸어가는 중에 신호가 어설프게 바뀌어 못 건너가게 되면 꽤나 아쉽습니다. 운이 없다고도 생각합니다. 왜 그럴까요?
포기가 아니며, 움켜쥘수 없을 것 같은 불안함이 없는 상태는 가능한것일까요?
오늘은 걸으면서 신호등을 체크하지 말아야지… 한 걸음 앞만 보고 걸어야지…
신호가 초록으로 바뀌는 것이 무슨 대수람…
신호등은 시간이 지나면 바뀌기 마련이잖아…
왜 조금이라도 예상치 안에서 움직여지는 것이 안심이 된다고 생각할까…
그런데 예상치 안에 발을 디디기 위해 더 불안하잖아!!!
재촉하던 발걸음을 늦추고 한걸음 앞만 보고 걸었습니다.
마음이 꽤 편안해 지더군요.
한 걸음 앞만… 뭔가 풀이가 있을 것 같습니다만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여기서도 답이 나와야 안심이 되는 제 기질이 작동하는 군요.
허허… 이런 기질은 늘 불안을 야기시키는 단점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버지 하나님께 자꾸 질문을 달면 가르쳐주시니 요즈음은 장점으로도 생각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