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1년 살기 도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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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은 아름다운 해안도시가 바다와 맞닿아 있고 야경이 아름다우며, 특히 해산물 음식 맛이 일품이다. 그래서 예전부터 포르투갈을 꼭 한번 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유럽 대륙의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어 우리나라에서 거리가 매우 멀어 짧은 휴가기간 동안 그곳을 다녀오는 것이 참 애매했다. 그래서 스페인에 있는 동안 이웃인 포르투갈에 꼭 다녀오고 싶었다.
"한국에서 유럽으로 오기 힘드니 스페인에 있을 때 많이 여행 다니자."
"일단 가까운 포르투갈부터 가보는 게 어때?."
7월 초부터 딸아이의 유치원은 두 달간의 긴 여름방학을 시작한다. 이 기간에 맞춰 아내와 함께 다니던 어학원에 방학을 신청을 했다. 여름방학 동안 우리 가족은 포르투갈을 시작으로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등 유럽 이곳저곳을 여행하기로 계획했다. 처음엔 포르투갈까지 기차를 타고 가려고 알아보니, 스페인에서 포르투갈로 가는 기차가 없다. 오로지 버스와 비행기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차를 타고 4박 5일 일정으로 포르투갈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포르투갈 포르투까지는 약 580km로 차를 타고 약 6시간 이동하면 된다.
"이쯤부터 스페인-포르투갈 국경인데, 출입국 심사는 어디서 하는 거지?"
"어? 그냥 표지판 하나뿐이네!"
별도의 여권심사와 같은 출입국 절차는 없었다. 다만 길가의 이정표를 보고서 이곳부터 포르투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유럽은 국가 간 이동이 이렇게나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게만 느껴진다. 포르투갈 포르투에 도착하니 'São João 상 주앙' 축제가 한창이었다. 여기저기서 음악소리가 들렸고, 생선과 고기를 굽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도시 전체가 축제 분위기로 들떠 있었다. 하지만 여행이 주는 설렘으로 내 마음도 들떠야 하는데, 이상하게 피곤한 기분만 든다. 도착 후 숙소에서 잠시 쉬고는 늦은 오후에 축제의 거리로 나갔다. 상 주앙 축제가 열리는 포르투의 밤거리는 사람들로 거리가 가득 메워져 있었다.
"뿅"
"뿅뿅"
사람들 손에는 '마늘꽃'과 '뿅망치'가 들려져 있었다. 그것을 가지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머리를 뿅망치로 한 대씩 때리는 걸 보았다. 우라는 이유도 모른 채 노점상에서 뿅망치 하나를 따라 산 후 그들처럼 지나가는 사람들을 가볍게 때리거나 맞으면서 즐겁게 웃었다.
어느덧 밤하늘은 수많은 소원의 별들로 가득 차올랐다.
걷다 보니 중간중간 소원을 담은 풍등이 이곳저곳에서 떠올랐다. 밤하늘은 온통 반짝이는 별들로 아름답게 물들었다. 우리 가족은 아름다운 밤의 풍경을 감상하면서 축제의 밤거리를 즐기며 돌아다녔다. 비록 우리는 피곤에 지쳐 숙소로 돌아왔지만, 그날 밤의 축제는 새벽녘까지 계속되었다.
그날 이후로도 우리는 포르투갈 포르투의 대표적인 관광지를 돌아다니면서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이면서 해리포터 작가가 즐겨 찾으며 작품의 영감을 받은 렐루서점을 방문한 후 도루강 위에 놓인 철교 위를 걸으며 시원한 강바람을 맞았다. 그리고 다리 아래로 펼쳐진 멋진 풍경을 감상했고, 유명한 포르투 와인을 생산하는 와이너리 공장 등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이곳에서 먹었던 음식들은 너무나 맛있었다. 특히 해산물이 들어간 음식은 그야말로 별미였다. 함께 마시는 포르투 와인과 베르데 와인이 음식과 여행의 맛의 풍미를 한층 북돋았다. 참고로 나의 기준으로 이야기하면 포르투 와인은 우리나라 머루 와인과 비슷해서 나에겐 너무 달게 느껴졌다. 대신 베르데(verde, 초록색) 와인은 화이트 와인으로 약간 덜 익은 초록색 포도로 만든 것인데 다른 와인들보다 새콤하면서도 상큼한 맛이 강해서 매력적이었다.
항상 여행을 떠날 때마다 내 마음속에는 설렘으로 가득 차있었다. 그런데 이번 여행은 어찌 된 일인지 이상하게 힘들고, 짜증이 많이 났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그런 날이 있지 않는가. 그러다 보니 여행 내내 아내와 딸아이에게 퉁명스럽게 대답하거나 짜증을 많이 냈다.
여행 3일 차, 그날도 숙소에서 나와 이곳저곳을 구경 다녔다. 마지막 일정은 포르투 와이너리를 구경하고 나서 저녁을 먹으러 가는 것이었다. 딸아이는 와이너리가 재미없다며 관람하기 싫으니 나가자고 자꾸 고집을 피웠다.
"난 여기 구경하기 싫어! 아빠 혼자 가!"
고집부리는 딸아이로부터 그 말을 듣고 나니 나의 감정은 상해버렸다. 나도 곧바로 딸아이에게 화를 내었고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로 전시공간을 대충 둘러보았다. 이후 야외 테이블에 앉아 시음용 와인 한잔 마시면서 잠시 머리를 식혔다. 그 후 저녁을 먹으러 가는 도중에 놀이터가 있었고 이를 본 딸아이는 잠깐 놀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잠시 그곳에서 쉬어가기로 했다.
놀이터에 있는 놀이기구는 딸아이에게는 다소 위험해 보였지만, 해보고 싶다고 해서 크게 말리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혼자서 천천히 잘 놀았기에 나도 아내도 곁에서 구경하고 있었다. 잠시 뒤 딸아이는 다른 친구가 철봉에 매달려 노는 것을 보았고, 그 모습이 자극이 되었는지 더 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욕심을 부리며 철봉을 하기 시작했다.
"철퍼덕.."
순식간에 무언가가 땅에 떨어지는 큰 소리와 함께 딸아이는 내가 바라보는 눈앞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보며 몸을 움직였지만, 아이를 잡기엔 역부족이었다. 혹시나 머리가 부딪혔나 싶어 보니 다행히 그렇진 않았고, 나는 울고 있는 딸아이를 달래었다. 그리고 다른데 다친 곳이 없는지 확인하는 중에 딸아이 오른쪽 팔이 심하게 부어오른 것을 보았다.
침착하고 냉정해야 한다.
내가 여기서 당황하면 안 된다.
바로 안 좋은 예감이 들어 빨리 병원에 데려가야 한다는 생각만 들었다. 구급차를 불러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딸아이 상태가 어떤지, 위치가 어딘지 설명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선 급하게 인근 응급실이 있는 병원으로 가기 위해 우버(Uber)를 호출했다. 아파서 울고 있는 딸아이를 안은 채 도착한 차를 타고 기사님에게 서둘러 응급실로 가달라고 요청했다.
첫 번째로 도착한 병원에서는 어린아이는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대답을 들었다. 그 대신 어린이 전문병원을 알려주었고 다행히 기사분이 해당 병원까지 다시 신속하게 데려다주었다. 이동하는 차가 흔들릴 때마다 아이는 아프다며 눈물을 흘렸다. 울고 있는 아이를 달래면서 아내와 난 예전에도 두 번이나 팔이 빠졌던 일이 있었기에 이번에도 팔이 빠졌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아이를 안심시키려고 노력했다.
저녁 8시가 조금 지나갈 무렵 우린 응급실에 도착했다. 급하게 진료 접수를 마친 뒤 딸아이와 나만 응급실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인원수 제한 때문에 아내는 대기실에서 기다려야만 했다. 딸아이는 간단한 진료를 마치고 엑스레이 촬영을 했다. 그 후로 다시 의사를 만나기까지 몇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나의 순서가 다가왔을 땐 벌써 다음날 새벽이었다. 진료실로 들어가니 4명의 의사가 심각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중 한 분이 나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딸아이는 팔이 부러졌고, 아침에 고정 수술을 해야 합니다."
"네?, 혹시 엑스레이 사진 좀 볼 수 있나요?"
난 딸아이 팔이 빠졌을 거라 생각했는데, 부러졌으니 아침에 수술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서 처음엔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엑스레이 사진을 보여 달라고 요청했고, 난 의사 뒤에 서서 사진을 바라보았다. 사진 속 딸아이의 가느다란 뼈는 골절된 상태였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가 없을 정도 심각해 보였다.
나에게 아이의 상태에 대해 설명을 마친 의사는 이 사실을 내가 딸아이에게 이야기하는 동안 잠시 기다려 주었다. 이후 의사는 부러진 팔의 뼈를 맞추었고, 그와 동시에 아이는 비명을 지르며 하염없이 많은 눈물을 흘러내렸다. 덩달아 내 마음속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내가 조금만 더 관심을 가지고서 아이를 지켜줬더라면...'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괴로움과 딸아이를 향한 미안함으로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내에게 바로 부러진 딸아이의 팔 엑스레이 사진과 내일 아침에 수술을 해야 한다고 알렸다. 그리고 침착하고, 냉정하게 난 여러 가지 생각들 하면서 아래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빠르게 내려야만 했다.
'임시로 뼈를 맞춘 후 한국으로 돌아가서 수술하는 게 나을까?'
'낯선 이곳에서 바로 내일 긴급수술을 해야 하나?'
이미 내 머릿속으로는 이곳에서 수술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잠시 뒤 아내에게서 이곳 포르투갈의 의료 수준이 높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나의 결정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아내 역시 나와 같은 고민과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후 수술 동의서를 작성하고 난 뒤 딸아이는 새벽 1시가 되어서야 병실로 옮겨졌다. 잠시 뒤 딸아이 팔에 링거 주사가 꽂혔고, 진통제를 포함해 여러 개의 약들이 투여되었다. 이미 지친 아이는 곧 잠에 들었다. 병실에는 보호자 1명만이 남아있을 수 있어 아내가 딸아이와 함께 했고 난 필요한 물건들을 챙기기 위해 숙소로 돌아왔다. 그때 시간을 보니 어느덧 새벽 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아침 9시 수술이니 그전까지 병원에 가야 한다.'
이른 아침에 곧바로 아이 병실로 들어갔다. 딸아이는 자고 있었고, 아내는 피곤한 몸을 일으키며 간밤에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잠시 후 간호사가 아이 수술복을 가져다주었다. 우린 오전 9시에 수술에 들어가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수술을 기다리는 시간은 점차 길어졌다. 기다림에 지쳐갈 때쯤 간호사가 긴급 수술환자들 때문에 순서가 자꾸 뒤로 밀린다고 알려주었다. 시간은 어느덧 점심시간이 지나고, 저녁 먹을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 모두 전날에 먹었던 점심식사를 제외하면 거의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심지어 딸아이는 수술 전에는 물조차 마실 수 없었다. 딸아이는 배고프고, 목이 마르다며 힘들어했다. 그 상태에서 해줄 수 있는 거라곤 젖은 수건으로 입술을 닦아주면서 아이를 달래는 것뿐이었다. 아픈 딸아이를 앞에 두고 있으니, 아내도 나도 뭘 먹거나 마시는 건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딸아이의 고통을 함께 느끼면서 아이 마음을 달래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오후 5시쯤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와 수술하러 간다며, 딸아이 침대를 밀고서 수술실로 향했다. 수술실 앞에서 의사로부터 딸아이의 수술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2개의 핀으로 부러진 뼈를 고정할 겁니다."
"수술이 잘되면 별도의 절개를 하지 않지만, 만약 잘 안되면 절개 부위가 커질 수 있습니다."
이후 마취 전까지 아이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수술실 안으로는 부모 한 명만 들어갈 수 있어 엄마가 함께 그곳으로 들어갔다. 수술실 문 앞에 앉아서 기다리는 동안 수술이 잘되기를 바라면서 간절히 기도했다. 잠시 뒤 아내는 참았던 눈물을 흘리면서 마음 따듯한 간호사의 도움을 받으며 밖으로 나왔다. 아내를 안고서 달래주다 보니 나 역시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제발 딸아이의 수술이 잘되게 해 주세요.
포르투갈 여행을 하면서 가족들에게 미운 행동을 많이 했던 기억들이 떠올라 내 마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아내에게 나의 마음을 이야기해 주었다. 아내는 지나간 일에 대해서 다 이해해 주었고, 내 잘못이 아니라며 다독여 주었다.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아이를 간호하기 위해서는 뭐라도 챙겨 먹고서 힘을 내야 했다. 눈앞에 보이는 자판기에서 열량이 높은 초콜릿과 커피를 뽑아 함께 나눠 먹었다. 먹으면서 다시 한번 더 지난 일들을 반성하면서 앞으로 더 잘해보자며 함께 용기 내어 보았다. 그리고 수술이 잘되도록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했다.
저녁 6시 30분쯤 수술실 문이 열렸다. 걸어 나오는 집도의의 밝은 표정을 보고서 수술이 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딸아이의 수술은 아주 잘되었습니다."
"이제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내일 퇴원할 수 있을 겁니다."
의사의 이야기를 듣고서 아내와 나는 안도할 수 있었고, 딸아이를 위해 노력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슴속에 간직했다. 이후 수술을 마치고서 마취로 잠들어 있는 아이를 데리고 병실로 들어왔다. 수술하러 가기 전까지 비워져 있던 옆침대엔 새로운 여자아이와 그녀의 어머니가 있었고, 우린 간단하게 인사만 나누었다.
마취에서 깬 딸아이는 수술에 따른 통증으로 울음을 터뜨렸다. 이후 진통제를 맞고서 안정을 되찾은 아이는 다시 잠들었다. 늦은 저녁때쯤 담당의사가 회진을 왔고, 수술이 잘되어서 내일 퇴원해도 된다고 재차 말해주었다. 하지만 수술 후 채 하루가 지나지 않은 상태로 퇴원하려니 걱정이 앞선다.
'포르투갈에서 스페인 마드리드까지 긴 거리를 차를 타고 어떻게 가야 할까?'
'만약 집까지 가는데 딸아이가 아프면 어떻게 하지?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괜찮을까?'
그날 저녁은 아내를 숙소로 보내고서 홀로 아이를 돌보았다. 새벽부터 수술 후유증으로 보이는 증상이 딸에게 나타났다. 아이 왼쪽 턱과 얼굴이 많이 부어올랐고, 아프다며 잠에서 깬 아이는 힘들어했다. 바로 간호사를 호출하고서 아이 상태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려는데, 야간 당직간호사가 영어를 하지 못했다. 그때 병실 반대편에서 잠자던 환자 어머니가 깨어나 나의 말을 포르투갈어로 통역해 주었다. 그분의 도움 덕분에 아이의 증상에 대해서 간호사에게 설명하고, 진통제를 추가로 처방받을 수 있었다.
아내가 아침에 병원에 도착했다. 난 간밤에 아이에게 나타는 증상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아침 식사시간이 지난 얼마 후 딸아이의 후유증 내용을 전달받고서 내과 의사가 찾아왔다. 의사는 아이의 증상을 관찰하고선 조금 더 추이를 지켜보자고 했다. 그로 인해 딸아이는 며칠 더 입원하게 되었다. 입원기간이 길어져서 병원에 머무르며 아이에게 필요한 진료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린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병실에는 저녁시간에 보호자 1명만이 남을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에겐 숙소가 필요했다.
우리 옆에 입원한 환자 보호자의 어머니는 당당하면서, 품위가 있어 보였다. 영어와 포르투갈어를 유창하게 했기에, 간혹 우리가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도움을 주셨다. 우리가 딸아이 침대 곁에 앉아서 쉬고 있을 때 옆 환자 보호자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그리고 서로가 가지고 있던 궁금증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희는 아프리카 앙골라에서 왔어요."
"우리는 한국에서 왔고, 지금은 잠시 스페인에 살고 있어요."
"딸아이가 어떻게 하다가 여기서 수술받고 입원했나요?
"여행으로 이곳에 왔고, 아이가 놀이터에서 철봉 하며 매달려 놀다가 떨어져 팔이 부려졌어요."
"저희 아이는 암으로 여기 입원해 있어요."
"암이요?"
"..."
아내와 나는 13살 정도로 되어 보이는 아이가 입원한 이유를 듣고서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여자아이의 병명은 '암'이었다. 나와 아내는 그 병에 대해 이야기로만 들었지 바로 곁에서 직접 눈으로 환자를 본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분에게 듣게 된 모든 이야기가 우리에겐 낯선 것들이었다.
완치 판정을 받고 집에 돌아가려고 했는데,
또 다른 암이 발견되었어요.
그리고 뒷 이야기를 듣고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처음 암판정을 받고서 앙골라에서 의료기술이 뛰어난 이곳 포르투갈로 온 후 4년가량 투병을 했었단다. 얼마 전에 완치 판정을 받고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마지막 검사를 했는데, 불행하게도 또 다른 암세포가 발견되어서 다시 입원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아이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엄마와 딸아이가 이곳 낯선 포르투갈에서 4년이라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니 가슴 아픈 일이다. 어린 나이에 학교와 친구들 없이 혼자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서 있었다는 걸 생각하니 아이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까 느껴졌다. 더군다나 오랜 시간 동안 암과 싸워서 이긴 후 이제 겨우 가족과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가는 희망을 가졌을 텐데 또 다른 암이 발견되었다니 그 좌절감이 어느 정도일지 알 수가 없다. 지금껏 이들이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잘 버텨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에겐 큰 삶의 교훈처럼 느껴졌다.
딸아이의 사고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었는데,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대화를 하고 있으면 그분에게서 우리의 힘든 마음을 위로받는 듯했다. 여행 중에 일어난 사고로 수술을 마치고 나온 딸아이가 그분에게 눈에 밟혔던 것 같다. 그렇게 서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 뒤 다시 각자의 아이에게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분에게서 들었던 이야기 중 자꾸 우리 부부 마음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아이가 아픈 뒤부터, 미래에 대한 계획을 하나도 세울 수가 없었어요."
때마침 우리의 숙소 예약기간이 끝날 때였고, 딸아이는 수술 후유증이 나타나 병원에 며칠을 더 있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병원 근처 숙소를 알아보는데 마땅한 곳이 없다. 가까운 곳의 하룻밤 숙박비는 비싸서 보다 저렴한 곳을 찾아 이곳저곳을 알아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 옆침대 어머니께서 우리에게 생각지도 못한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었다. 자신이 병원 근처에 있는 호텔 장기 투숙을 하고 있는데, 딸아이 상태가 좋지 않아서 숙소에 갈 수 없으니 우리가 그 숙소를 이용했으면 좋겠다는 거였다. 그리고 숙소에는 조식과 점심이 제공되니 꼭 함께 이용하라고 당부하셨다. 처음에는 이 상황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리고 우리에겐 너무나 큰 도움의 손길이라 섣부르게 잡을 수 없어 그녀의 마음만 받고서 정중히 거절했다.
그 이후 자원봉사자를 통해 좋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아이가 입원한 병원은 맥도널드에서 후원하는 곳이라고 했다. 그래서 환자와 보호자를 위한 다양한 편의를 제공해 주는 프로그램이 있다고 한다. 그중 집이 멀리 떨어져 있는 보호자들을 위한 무료숙소를 제공해 준다는 내용도 있었다. 난 용기 내어 지원센터를 찾아가 숙소지원에 대해서 요청했지만, 아쉽게도 남은 방이 없었다. 아내에게 이 내용을 이야기해 주었다.
"맥도널드에서 제공하는 숙소는 이미 다 찼데."
"그럼 새로운 숙소를 빨리 예약해야겠다."
"숙박비가 비싸네. 그리고 병원비도 얼마가 나올지 모르겠어."
"보험이 있긴 하지만 수술도 하고 입원기간도 길어져서 금액이 상당히 많이 나올 듯한데..."
"저번에 옆에 분이 제안했던 도움을 받을걸 그랬나?"
급하게 새로운 숙소를 예약을 하고 있는데, 옆에 계신 분이 다시 한번 더 우리에게 자신의 숙소에 머무르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보셨다. 두 번째 제안도 우린 정중히 거절했다. 괜히 우리보다 더 힘든 상황에서 베풀어 주는 도움을 받기가 염치가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도움을 받는데 익숙하지 않아서 용기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왠지 도움을 받고 나면 빚을 진 것 같은 마음이 들어 불편해질 거 같았다. 하지만 그분의 진심은 분명하게 느껴졌고, 병원비도 걱정이 되었기에 아내와 나는 다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에게 손을 먼저 내밀어 주셨는데 거절을 하는 게 맞나?"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도움이잖아."
"그분의 도움을 받아보는 건 어떨까?"
"다시 그분에게 이야기를 해보자."
아픈 아이 옆에 잠시 앉아 쉬고 있던 그녀에게 우리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숙소를 이용해도 될까요?"
"너무 잘 생각했어요. 도움을 줄 수 있어 정말 기뻐요."
"너무 감사합니다."
"숙소는 아침과 점심을 제공해 주는데 그것까지 꼭 이용하세요."
"네, 정말 감사합니다."
그렇게 우리 부부는 그녀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그날 점심식사 겸 숙소 위치를 알려주겠다면서 아내는 그녀와 함께 숙소로 나섰다. 아내는 그녀와 걸어가는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대화의 내용을 나에게 알려주었는데 기억에 남는 것이 있었다.
"진심으로 도움을 주고자 했는데, 왜 도움을 받지 않으려고 했어요?"
"나도 딸아이가 아픈 동안 주변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그래서 저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고자 합니다."
그녀의 말을 듣고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내와 나는 다른 생각들은 잊어버리고, 그분의 진심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진정한 행복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이것은 그동안 스스로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얻을 수 있는 행복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남을 도와주면서 느낄 수 있는 행복의 감정은 내가 알던 것보다 더 뜨거웠다.
용기 내어 타인의 도움의 손길을 잡아보니,
지금껏 느껴보지 못했던 행복을 느꼈고, 진정한 삶의 가치를 깨달았다.
그녀의 도움으로 우리는 불편함 없이 병원에서 아이를 잘 돌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 부부도 그녀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줄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고 행동했다. 아이가 아파 자리를 비우지 못해 식사를 잘 챙기지 못하는 그녀를 위해 아침마다 간단한 도넛과 따뜻한 커피를 그녀 몫까지 사와 나누었다. 그녀도 우리의 도움에 대해서 거부를 하지 않고서 밝게 웃으며 고마움을 표현해 주었다. 그 표현에 아내와 난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거나 주면서 느낄 수 있는 값진 행복의 의미를 깨우치게 되었다.
지금까지 타인은 비교 대상으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비교가 아닌 이타심으로 바라보니 또 다른 행복의 가치와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 서로에게 도움을 주거나, 받을 수 있는 관계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 것이다. 처음 만난 낯선 사람에게 집을 내어줄 수 있는 만큼의 용기는 아직 나에게는 어렵다. 그러나 그분의 도움으로 알게 된 삶의 가치와 교훈은 쭉 이어갈 듯하다. 이타심에서 느낄 수 있는 행복은 지금까지 느꼈던 행복과는 다르다. 삶을 더욱 풍요롭고 가치 있게 만들어 준다.
딸아이가 입원한 병원은 포르투갈 포르투에 있는 유명한 대학병원으로 규모도 크고 아동전문 병동을 가지고 있다. 이곳의 의료 수준은 아주 높아서 외국에서도 치료를 받기 위해 찾아온다고 한다. 대부분의 의사들은 영어로 소통이 가능하고, 간호사들 중 일부는 영어를 사용할 수 있어서 의사소통하는 데 있어 크게 어려움은 없었다. 만약 간호사들 중에서 영어를 못하는 분이 있으면 영어로 소통 가능한 분과 함께 동행해서 우리에게 도움을 주었고, 그것도 안되면 구글번역기를 사용해서 불편한 점이 없는지 꼭 물어봐 주었다.
의사, 간호사 분들 뿐만 아니라 식사를 준비해 주시는 분들, 그리고 매일 아침 청소를 해주시는 분들 또한 비록 우리와 소통은 안되었지만, 우리에게 뭐라도 하나 더 챙겨주려는 따뜻한 마음을 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과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매일 자원봉사자분들이 병실을 찾아와 도움이 필요한 게 있는지 물어보았다.
"식사는 하셨나요?"
"혹시 못했으면 아이는 저희가 돌봐드릴 테니 식사하고 오세요"
보호자가 잠시 자리를 비울 수 있도록 아이와 함께 놀아 준다며 찾아왔다. 때론 피에로 복장을 입고 아이들에게 웃음을 주기도 하고, 책을 읽어주러 오신 분, 그리고 종교는 다르지만 매일 아이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러 온 수녀님들을 포함해서 병원 모든 사람들이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우리 부부가 그들에게 최소한의 보답이라도 하기 위해 서툰 포르투갈어로 기본적인 인사나 감사 표현을 익혀 고마움을 표현했다. 그러자 그들 모두 해맑게 웃으며 기뻐했다.
어느덧 병원에 거진 일주일 동안 입원을 했고, 모든 이들의 보살핌 덕분에 딸아이는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퇴원하는 날이 다가오면서 병원비에 대한 걱정이 커져 갔다. 병원에 머물면서 건강해지는 딸아이를 보고 있으면 돈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막상 퇴원하는 날이 눈앞에 다가 오니 사뭇 부담감이 커져 갔다. 어쨌든 결재는 해야 했기에 가지고 있는 신용카드의 한도를 최대로 변경해 놓았다.
마지막 진료를 마치고 고마웠던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선 퇴원 수속하려고 병실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아무런 이야기가 없다. 간호사에게 어떻게 퇴원하는지 방법을 물어보았다.
"퇴원하려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냥 가시면 됩니다."
"네? 저희는 이곳 의료보험이 없기 때문에 병원비 결재해야 할거 같아요."
"아뇨, 포르투갈에서 사고를 당한 거라 병원비는 안 내셔도 될 겁니다. 혹시 모르니 담당자에게 물어보세요."
순간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병원비를 안 내고 그냥 집에 가라는 데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알려준 담당자에게 다가가 재차 확인했다. 그 역시 병원비 납부는 안 해도 된다며, 만약 납부가 필요하면 별도로 연락을 할 거라고 했다. 아내와 난 놀란 마음을 진정시켜야 했다.
"포르투갈 너무 고맙다. 이 기억은 잊지 못할 거 같다."
"비록 아이가 다쳐서 힘들긴 했지만, 이곳에서 받았던 고마움과 삶의 깨달음은 잊을 수 없을 것 같아."
"그리고 누군가를 도와준다는 게 얼마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일인지 알게 되었어."
병원을 나오면서 포르투갈에서의 안 좋았던 기억들은 모두 잊어버렸다. 그리고 내 인생을 더 가치 있게 만드는 삶의 방향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