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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샨띠정 Jan 10. 2024

인도 학교 적응기

엄마, 목이 아파

엄마목이 아파(인도학교 적응기)     

인도에서의 생활이 시작되면서 시간도 서서히 흘러갔다. 이제 제법 한국말로 종알거리기 시작하리라는 나의 기대와는 달리 아이의 말문이 쉽게 터지지 않았다. 나는 조금씩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한국어 그림책을 읽어주고, 우리말로 대화를 시도해도 어쩐 일인지 딸아이의 한국말은 쉽게 트이지 않았다. 한국어 발음이 명확하지 않았다. 주위에서 인도 유치원을 보내라고 성화였지만, 나는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먼저 아이가 한국어를 좀 더 습득한 후에 인도 유치원에 보내고 싶었다. 


주변에서도 기다려보는 것이 좋겠다고 했는데,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이러다가 한국어를 잘 못하는 한국 아이가 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어 한국에 긴급하게 도움을 요청했다. 아무래도 한국어 환경을 만들어 주고, 한국어에 더 많이 접해줘야 할 거 같았다. 온통 우리 주변에는 힌디어와 영어를 구사하는 인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어를 더 많이 접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우리말을 습득하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     

샤이니의 작은 아빠와 이모부가 정성스럽게 한국어와 영어로 된 다양한 애니메이션을 외장 하드에 담아서 보내줬다. 그제야 나는 아이에게 뽀로로를 비롯해 ‘신데렐라, 라이언킹, 미녀와 야수, 인어공주, 겨울왕국, 백설 공주, 라푼젤, 알라딘’ 등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미디어를 멀리하고 싶었던 나의 의지가 어쩌면 아이에게는 오히려 도움받을 기회를 늦추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아이의 한국어 발화는 조금 나아지는가 싶다가도, 말문이 시원하게 폭포수처럼 터지진 않았다. 영어와 힌디어를 사용하는 주변인들 덕분에 아이가 힌디어와 영어를 말하기 시작했지만, 정작 중요한 모국어는 많이 부족했다. 엄마의 속이 타 들어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아이가 만 4세가 되었을 때, 인도 유치원에 보내기로 마음을 정했다. 호주의 유치원 교과과정을 따르는 캥거루 유치원에 보냈는데, 다행히도 좋아했다. 애석하게도 캥거루 유치원은 샤이니가 무척 좋아하는 곳이었지만, 우리가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하는 바람에 아쉬움을 뒤로 하고 떠나와야만 했다. 후에도 아이는 두고두고 캥거루 유치원을 그리워했다.      


이사를 하고 나서 집 근처에 있는 유치원 ‘더 러닝 플레이스(The Learning Place)’에 보내기 시작했다. 딸아이는 호주에서 온 톰과 미국 아이 조슈아 등 인도 아이들과 함께 유치원 생활을 잘하고 있었지만, 그 당시 다른 아이들과 달리 영어를 집중적으로 배우지 않았다. 한국어 습득에 대한 부담감으로 인해 조금 더 천천히 영어를 가르치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린 딸아이와 인도 친구들


같은 동네에 있던 유치원 ‘더 러닝 플레이스’는 우리 집에서 걸어서 다닐 수 있는 거리였지만, 우리는 줄곧 사이클 릭샤(자전거 인력거)를 타고 다녔다. 딸아이는 특별히 릭샤 왈라(자전거 릭샤를 끄는 사람)가 태워주는 사이클 릭샤 타는 걸 너무 좋아했다. 그러다 보니 매일 아침이면 몇몇 릭샤 왈라들이 사이클 릭샤를 세워두고 대문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곤 했다. 나중에는 꽤 정직하고 성실한 카빌이라는 이름의 릭샤 왈라와 매일 유치원 등하교를 했다. 늘 웃으며 따듯한 미소를 잃지 않고, 아이에게 다정하게 대해주며 유치원까지 실어 나르던 카빌에게 지금도 고마운 마음이 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우리가 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과하게 사이클 릭샤 요금을 요구한 적이 없었다. 지금도 떠올려 생각만 해도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머문다. 우리 모녀에게 그토록 따스하고 좋은 추억을 선물해 준 그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      


샤이니가 만 6세가 되어 정식 학교 유치원 K.G.(1학년이 되기 전의 공식 유치원 과정)에 들어갈 때가 되었다. 아이는 간단한 시험을 거쳐 국제학교에 입학했는데, K.G. 1년 동안 샤이니와 우리는 많이 울고, 힘에 겨운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영어와 힌디어, 심지어 한국어도 완벽하게 습득하지 못한 샤이니에게 K.G.에서의 공부는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일을 하다가, 때로는 밥을 먹다가도 학교에서 오는 전화를 받고 학교로 달려가야 하는 날이 많았다. 어쩌면 미국 학제를 따르는 국제학교가 샤이니에게는 벅찬 과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딸, 학교는 어때?”

“힘들어.” 

“뭐가 제일 힘들어?”

“엄마, 목이 아파. 목이 자꾸 아파. 여기가.”

“그래? 목이 왜 아프지?”

“엄마, 말이 잘 안 나와.”     


처음 샤이니는 영어로 말하는 게 꽤 힘들었던 모양이다. 선생님은 샤이니가 수업 시간에 자주 화장실을 간다고 걱정하셨다. 내겐 그 말이 너무 가슴 아프게 들렸다.     


‘아이가 숨 쉬는 공간이 화장실이었구나. 우리 아이는 목이 아프고 숨이 막힐 때마다 화장실로 가서 스스로 스트레스와 불안을 해소하고 있었구나.’     

그렇게 우리는 인도에서 깊은 고민에 빠져들어 갔다. 화장실이 아이에게는 도피처였다. 학교에서는 샤이니에게 영어만 말해야 한다고 했고, 우리에게도 집에서 영어로만 대화하라고 강요했다. 나는 한국어를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집에서는 반드시 한국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설득했지만, 선생님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외국인으로서 샤이니의 학교생활은 그리 녹록치 않아 보였다. 엄마로서 아이가 학교에 잘 적응하고 행복한 학창 시절의 추억을 남길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아이의 교육을 위해 기도할 도리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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