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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샨띠정 Jan 02. 2024

인도의 시골 풍경

시골 마을의 작은 신학교

 남편은 델리 외곽에 있는 시골 마을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인도 전역에서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학생들이 와서 기숙하며 생활하는 신학교였다. 처음 인도에 도착하자마자 강의를 시작한 남편을 위해 아직 어린 딸아이를 데리고 그 길을 동행했다.      

처음에는 지리를 잘 알지 못해서 신학교 학장인 선교사님께서 우리를 데리러 오시기도 하고, 택시를 타고 가기도 했다. 나중에 자동차를 직접 운전해서 가기 위해 1시간 반이 훨씬 넘게 걸리는 그 복잡하고 먼 길을 매번 외우고 또 외웠다. 사실 인도의 길거리 특히 시골에는 대부분 이정표가 없다 보니 랜드마크를 기억해야만 했다. 큰길과 작은 골목길, 삼거리, 사거리, 몇 번째 빠지는 길인지, 어느 학교가 있는지, 멀고 먼 시골길을 다 외워야 했다. 그 당시에는 내비게이션이 없었다. 인터넷으로 데이터를 쓰지 못했고, 스마트폰도 보급이 안 된 상태라 감각과 기억력에 의지해야만 했다.      


나는 강의하는 남편을 위해 아이를 태우고 직접 운전기사가 되었다. 이미 영국에서도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는 운전을 했었기에 용기를 내볼 만했다. 도로에는 차선이 없었다. 신호등도 물론 거의 없었다. 아니 필요가 없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도로포장도 되어 있지 않은 비포장도로의 울퉁불퉁한 길을 달리고 또 달렸다. 육감과 기억력을 의지하여 목적지 신학교를 향했다. 유채꽃이 피는 겨울에는 끝없는 노란 유채꽃밭을 달렸다. 한참을 달리다 보면 그곳이 한국인지 인도인지 혼돈의 상태가 되기도 했다. 그렇게 길을 더듬어 서서히 가다 보면 우리가 가고자 하던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했다. 때론 길을 잘못 들었다가 다시 돌아 나온 적도 있었다. 더 가까운 길을 찾아보기 위해 몇 가지 새로운 노선을 도전해 보기도 했다. 마침내 신학교가 있는 동네가 멀리서 보이면 안도와 감사가 절로 나왔다.      


그 시절, 나는 인도 사람들의 삶의 깊숙한 부분을 조금은 더 볼 수 있었다. 나와 딸아이는 신학교나 함께 일하던 선생님의 집에 머물며 강의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딸아이도 그 순간을 즐겼다. 신학생들과도 허물없이 지내며 사랑을 많이 받았다. 무더위에 전기가 나가는 시간이 들어오는 시간보다 적어서 바닥에 누워 더위를 참고 견뎌야 했던 그 소중한 시간에 감사한다.

같이 카레향이 가득한 맛난 음식을 만들어 먹고, 소똥을 연료로 해서 굽는 로띠(납작한 빵)는 고소하기만 했다. 남편은 인도 학생들이 머리가 좋다고 늘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처음엔 영어를 잘 모르던 학생들이 강의가 시작되면서 영어로 하는 강의를 이해하고 읽고 쓸 수 있게 된다는 것이었다. 얼마나 뿌듯하고 행복했는지 모른다. 푹푹 찌는 더위에도 땀을 뻘뻘 흘리면서 강의를 할 수 있었던 힘이 되었을 것이다. 훌륭한 인도의 목회자가 더 많이 세워지기를 바라며 희망으로 바라보았다. 후에 더 깊은 신학교육을 하기 위해 미국의 신학대학교와 MOU를 맺는 과정을 진행하면서도 인도의 미래를 꿈꾸었다. 비록 우리의 모습이 부족한 부분이 많았지만, 더 많은 인도의 인재들이 배출되어 나올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강의가 늦게 끝나면 그곳에서 밤을 보내고 올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인도 시골의 밤은 우리에게 쉽지 않았다. 거실과 방, 부엌과 거실을 오갈 때마다 생쥐들이 지나다니기도 했다. 침대 밑으로 들어가는 쥐를 보고 화들짝 놀라서 도저히 침대에 올라가 잠을 청할 수 없을 때도 있었다. 이미 그 모든 환경에 적응이 되어버린 선생님은 아무렇지 않았다. 소스라치며 놀라는 내게 괜찮다고 토닥거려 줄 뿐이었다. 잠을 자기 위해 침대 위에 모기장을 쳤다. 시골의 모기는 마치 테러리스트들과 같았다. 아이를 데리고 모기장 속에서 잠을 청했지만, 단체로 물어뜯는 모기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자다가 일어나서 전기 모기 채를 들고 휘저으면 그야말로 ‘따따따 딱’하고 따발총 같은 소리를 내며 모기들이 죽어갔다. 그러다가 다시 잠을 청하려면 다시 어느새 셀 수 없을 만큼 수많은 모기들이 우리의 몸에 공격을 가해 왔다. 모기 기피제를 바르고 물파스를 발라도 피부가 가려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밤새 제대로 한숨을 잘 수가 없던 때도 있었다. 마당 한편, 바깥에 있는 화장실에 가서 변기 뚜껑을 열면 그야말로 셀 수 없는 모기떼들이 우수수 얼굴로 쏟아져 올라왔다. 모기떼가 아니라 마치 벌 떼와 같았다. 가끔은 모기와 파리떼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 될 때도 있다.      


그래서인지 인도 사람들은 긴 여름을 보내며 어서 겨울이 오기를 기다린다. 수많은 모기떼의 공격에 치를 떤다. 모기들은 뎅기열이나 말라리아를 몰고 와서 인도 사람들을 괴롭히기 일쑤였다. 주변에 많은 이들이 해마다 모기로 인한 병으로 고생했다. 우리가 8년을 넘도록 인도에서 지내며 단 한 번도 뎅기열이나 말라리아, 장티푸스나 결핵으로부터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너무나 감사한 일이었다. 기적이고 은혜였다.      


무더위에 땀이 줄줄 흘러내리면 에어컨이 있는 방으로 피신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더위를 식힐만하면 전기 공급이 끊기고 말았기 때문이다. 하루에 전기가 나가 있는 시간이 전기가 들어오는 시간보다 길다. 특히 시골에는 전기가 공급되는 시간이 극히 제한적이다. 물과 전기가 충분히 제공되지 않는 인도의 시골 마을에서 견디기란 사람으로서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다는 생각을 줄곧 했다. 동료 선생님들이 너무 대단해 보였다. 어떻게 그런 환경 가운데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지금도 그분들은 여전히 그곳을 지키고 있다. 아무리 그때보다 인도의 상황이 더 좋아졌다 해도 여전히 열악한 그곳에서 살아내는 모습이 대단할 따름이다. 인도 사람보다도 더 인도 사람처럼 살아가고 있으니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시골의 인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삶의 모습을 보는 것은 더없이 흥미로웠다. 빨간 수박을 썰어놓고는 그 위에 검은 흑소금이나 마살라 소금을 뿌려서 달달한 수박 맛을 묘하게 변형시켜 이상야릇하게 만들어 먹는 그들을 따라 했다. 오이도 마찬가지였다. 망고의 껍질을 깎아서 먹지 않고, 손가락으로 조몰락조몰락 물컹거리게 해서 즙을 만들고 나서 쭈쭈바를 먹는 것처럼 망고 꼭지가 있는 곳에 구멍을 뚫어 쪽쪽 빨아먹었다. 새로운 방식으로 먹던 망고의 맛을 배웠다. 익지 않은 파파야와 망고는 채를 썰어 고춧가루를 뿌리고 마늘과 파를 다져 넣어 무채처럼 만들어 반찬으로 먹었다.      


염소 고기로 냄새나지 않는 머튼 카레(Mutton Curry)를 만들어 주던 달월 삼촌을 기억한다. 심지어 그는 인도 힌두교 상위 카스트의 지위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해 고기 요리를 해주셨으니 놀라울 따름이다. 그 외 다른 사람들이 만드는 염소 고기 요리는 도저히 냄새가 나서 먹을 수가 없었다. 다시 그곳에 가서 맛있는 염소 고기로 머튼 카레를 만들어 달라고 조르고 싶다. 몸이 약한 여자들에게 좋다는 염소 고기를 냄새 때문에 제대로 먹을 수 없었던 게 후회막심할 따름이다.      


지금도 눈에 선하다. 신학교에 가던 그 길을 기억한다. 수도 없이 운전하여 다녔던 그 길이 눈을 감으면 눈앞에 펼쳐진다. 언제나 길가에 앉아 서로 이를 잡아주던 원숭이 가족들도, 목동들이 염소 떼를 몰고 지나가던 그 길도, 유채꽃이 노랗게 피어있던 드넓은 들판도, 길가에 늘어선 인도의 가정집들, 아이들이 쏟아져 나오던 인도 정부 학교들의 모습들, 길가에서 곤히 잠을 청하던 개들도, 느릿느릿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고 유유자적하게 길을 걸어 다니던 소들도 보인다. 울퉁불퉁해서 엉덩방아를 찧던 그 길의 그 느낌을 지금도 느낄 수 있다. 천장에 매달린 채 웽웽거리던 인도 선풍기 뻥카(Punkah, 인도 실내의 천장마다 달려있는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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