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가장 용기가 필요했던 여정이었다. 탑승객 수속을 받을 때부터 흐르던 눈물은 비행기 좌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도 멈추지 않았다. 곁에서 안절부절못하던 남편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나름 어깨가 무거웠을 테다.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내고 있는 한 여인을 낯선 이국 땅에서 잘 보살피고, 지켜낼 수 있을지 스스로도 버거웠으리라. 그런 남편은 울지 말라는 말도 못 한 채 가만히 내 손만 움켜쥐고 있었다. 한 손은 내 어깨에 가볍게 올린 채로. 그러기라도 하면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뜨거운 액체가 멈추어 줄 것처럼.
비행기가 이륙하자 흐느낌 소리가 더해졌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신경 쓸 여력도, 부끄러움 따위는 잊었다. 다행인지 웅웅 거리는 비행기 속에서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안내방송이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는 울음소리를 삼켰다. 마음도, 눈물도, 이별의 슬픔도 몸과 함께 높이 높이 날아올랐다.
런던 히드로 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늦은 밤이었다. 지하철을 타고 우리 둘은 버밍엄으로 가는 고속버스를 타기 위해 내셔널 익스프레스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등에는 무거운 가방을 하나 둘러메고, 두 팔 엔 커다란 이민 가방을 하나씩 끌면서 런던의 어두운 밤길을 남편을 따라 걸었다.
두 시간 정도 고속버스를 타고 무사히 버밍엄 터미널에 새벽 3시쯤 도착했다. 남편의 친구가 마중을 나온다고 했는데, 그곳에서는 아무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남편이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신용카드로 전화를 사용할 수 있었지만, 전화를 받는 사람은 없었다. 몇 번 시도를 하다가 우리는 포기한 채로 8월의 새벽 공기를 마셨다. 여름이었지만 차가운 새벽 기운에 떨리는 몸을 가방에서 꺼낸 얇은 담요로 덮었다. 일단 앉아서 무작정 기다리기로 했다.
그로부터 1시간 반 정도 지난 후. 남편의 친구가 우리 앞에 나타나 어쩔 줄을 몰라했다.
"깜박 잠이 들었지 뭐예요. 어찌나 깊이 잤는지 전화벨 소리도 못 듣다가 놀라서 깨어나 얼른 왔지 뭐예요. 진짜 미안해서 어떡해요."
부산 말씨로 서울 말을 하는 친구 분이셨다. 그의 집에 도착하니 거의 아침 6시가 되었다.
2004년 8월 4일 토요일 아침이었다.
내게 가장 큰 변화를 가져다준 내 삶의 전환점을 맞이하는 날이었다.
그 이전에도 해외에 수차례에 걸쳐 다녀온 적이 있었지만, 타국에 살기로 작정하고 간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사는 삶, 나누는 삶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만 했다. 하지만 늘 따스한 도움의 손길이 머물렀다. 우리 부부는 혼자였지만 혼자가 아니었던 셈이다. 나 또한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살피고, 도움이 되고자 애썼으며 그렇게 살았다. 어떻게 사람이 살아야 하는지 그곳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배우고 익혔다.
사랑이 내게 흘러오고, 다시 다른 이들에게 흘려보내는 인생의 중요한 메시지를 얻었다. 혼자서 헤쳐나가야 한다고 여겼던 내게 결코 혼자가 아니라고 가르쳐주었다. 지금도 가까운 언니와 친구로 남아 있는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내 인생의 황금기와도 같은 시기였다. 아끼고 재활용하며, 함께 공유하는 삶을 몸으로 체득한 교육 현장이기도 했다.
자연 친화적 삶
어린 시절에도 시골에서 살았었지만, 자연의 소중함이나 친환경적인 삶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 볼 기회는 없었다. 그러던 내게 정원이 있는 영국의 삶 속에서 꽃과 나무들, 야채와 과일, 심지어 흙 속에서 마주하는 지렁이를 보고도 비명을 지르지 않게 했으며, 아침마다 텃밭에서 상추를 뜯어먹는 영국 스네일(달팽이)까지도 가슴에 품게 되었다. 그때 받았던 그 영향은 끝없는 나의 정원 사랑과 텃밭의 고귀함으로 이끌어간다.
에덴동산에서 하늘과 땅, 바다와 물고기, 새들과 동물, 나무와 꽃들과 곤충들, 그리고 사람이 함께 더불어 살아가게 하신 뜻을 헤아릴 수 있었다. 그 후로 모든 생물을 바라보는 내 시선이 달라졌다. 친환경적인 삶을 노래하게 된 것이다.
소통과 배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마는 그래도 나는 그곳에서 다른 문화와 인종을 배려하고 수용하는 사회 구조를 보았다. 외국인인 내가 생활하기에 불편함이 없도록 영어로 천천히 대화를 시도했다. 상대방의 마음이 상하지 않으며, 소외되지 않도록 배려하는 문화가 사회 기저에 깔려 있었다. 그렇다고 인종차별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나 스스로도 중국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중국 유학생들과 친구가 되면서 깨끗하게 사라졌다. 피부색이 다양한 민족들 속에서 자신만의 고요함을 추구하기도 하고, 서로 융합하는 노력의 결과는 조화로운 사회구성원으로 스며들도록 돕고 있었다. 그런 수용성은 후에 인도에서 살면서 내가 현장에서 살아가는데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인간을 인간 그 자체로 존중하고 인정하며, 누구의 위나 아래에 내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애쓰지 않도록 나를 지탱해 주었다.
돌아보면 두려움과 함께 한 나의 작은 발걸음이 나를 성장시킨다. 가만히 있으면 결코 경험하지 못할 고귀한 교훈과 배움 속에서 나를 흔들고 엎고, 다시 정렬시키며 일으키는 것을 배웠다.
어쩌면 그날 8월의 한 여름에 영국에 가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 또 다른 모습의 내가 되어 있지 않을까?
그날, 비행기 좌석에 고개를 떨구고 눈물 흘리던 나는 이제 가슴이 꽤 넓어지지 않았겠는가? 내 세계관도 꽤 깊어졌으리라 기대한다. 여전히 아이 같은 연약한 존재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