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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존경하는 이, 엄마

난 엄마를 이길 수가 없다

by 샨띠정

내가 아는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용기 있고, 지혜로운 여인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나는 우리 엄마를 첫 번째로 꼽을 것이다. 마음속으로 존경하는 내 가장 가까운 분이 엄마니까.

어렸을 때는 고생 한번 안 하고 곱게 자란 엄마가 시집을 와서 할머니께 시집살이를 하며 고생하셨다는 엄마의 하소연을 다 이해하지 못했다. 어린 나의 이해폭의 한계치를 넘어설 수 없었을 테다. 할머니는 내게 너무나 다정한 할머니셨으니 엄마가 엄살을 부리시는 건 아닐까 하고는 내심 엄마의 울화에서 올라오는 깊은 한숨을 다 알아채지 못했으니까.


더 나이가 들고 나서야 모든 게 어설픈 낯설고 험한 곳에서 교회에만 빠져있고 집안을 돌아보지 않는 할머니 밑에서 얼마나 고달팠을지 조금은 깊이 엄마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할머니는 드시고 싶은 것도 많으셔서 손 하나 까딱 하지 않으시면서 엄마에게 맛있는 요리를 해내라고 당당하게 요구를 하셨다. 여리고 약한 몸을 이끌고 엄마는 그 모든 요구를 수용하셨다. 몸이 부서지도록. 그 덕분에 우리는 늘 먹을 것이 풍성하여 할머니 덕을 톡톡히 봤지만, 엄마는 결국 병을 얻고 말았다.


우리 삼 남매는 너무 어려서 정확히 기억할 수 없지만, 엄마가 거의 죽을 것처럼 위장병을 얻어 고생하다가 하나님께 매달려 병이 깨끗하게 나으셨다는 간증을 수없이 많이 들어 알고 있다. 건강을 회복한 엄마는 바쁜 와중에도 할머니와 우리를 위해 다양한 간식들을 직접 손수 만들어 주셨다.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도넛, 술빵, 타래과자, 경단, 고로케, 깨강정, 콩강정, 유과, 고구마튀김, 갖가지 부침개, 팥칼국수, 호박죽 등 끝없는 메뉴가 있었다.


우리 집은 늘 정갈했다. 엄마는 논리적인 사고를 하시는 분이셔서 체계적으로 일을 시키며, 본인도 그렇게 하셨다. 우리가 베고 덮었던 이불과 베개에서는 한 번도 쾌쾌한 냄새가 난 적이 없었다. 그 때문인지 나도 이불 빨래에 꽤나 신경을 쓴다. 엄마의 영향 때문이다.

부끄럽지만 결혼 전까지 엄마는 우리의 옷을 세탁소에 맡기고, 삶고 다리는 모든 걸 담당해 주셨다. 심지어 신발까지도. 방 청소와 이불 모두.


결혼해서 독립하여 살면서 나는 엄마처럼 잘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가슴 절절이 깨닫고 있는 중이다. 지금도 친정에 가면 정갈한 엄마의 방과 화장실을 보며 존경심을 갖곤 한다. 청결을 유지하는 그 부지런함에 감탄한다.


엄마는 입술로 죄를 짓지 않으신다. 한 번도 다른 사람을 흉보거나 욕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예외는 있다. 아빠한테는 그 잔소리가 하늘을 찌를 때가 있으니까. 나한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일까? 나는 엄마의 인정을 받아내기 위해 부단히 도 애를 쓰곤 했다. 때론 울면서 엄마와 싸우기도 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다정하고 따뜻한 엄마는 유난히도 내겐 칭찬을 아끼셨으니까.


엄마의 귀는 넓고도 깊다. 어려서부터 나는 하루의 모든 일들을 엄마에게 다 쏟아냈다. 엄마는 그 모든 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시며 엄마의 큰 귓속으로 다 빨아들이셨다. 내 얘기가 다 끝날 때까지.

성인이 되어 고민과 마주할 순간에 엄마에게 털어놓고 기도를 부탁하면, 끝없이 기도로 도우시며 지혜의 말로 나를 위로하며 세워주셨다. 넘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붙잡아 주시면서.


엄마는 뭐든지 맡은 일은 확실하게 해내신다. 어느 것 하나 흐지부지 꼬리가 작아지는 경우가 없었다. 난 그런 엄마의 눈에 들도록 부단히 도 열심히 노력했다. 여전히 부족해서 스스로 자괴감이 들 때도 많았지만.


지난 크리스마스 성탄절 저녁, KBS 공영방송 조수미와 함께 하는 특별한 성탄절 콘서트에 고운 드레스를 입은 엄마가 등장했다. 가수 온유와 함께 합창을 부르시면서. 실버합창단 단원으로 10년 이상을 빠짐없이 연습을 하고, 각종 대회에 나가 상을 타시더니 KBS 방송국 공개홀에서 조수미와 함께 콘서트를 하시다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엄마, 나이도 있으니까 너무 열심히 하지 말고 살살하세요."

이런 나의 잔소리와 부탁에 늘 이렇게 대답하신다.


"내가 할 수 있으니까 하는 거 아니겠냐. 나는 뭐든 하면 확실하게 적극적으로 하지 그냥저냥은 안 하면 안 하지 못한다."


결국 83세의 엄마는 고운 푸른색 롱스커트에 연 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당당하게 텔레비전에 나오셨다.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분이신가?


나보다 더 기도하시는 엄마. 나는 엄마의 기도를 아직도 따라가지 못한다. 지금도 날이 추워 길이 얼어도 걸어서 새벽기도에 빠짐없이 다니시는 엄마. 엄마의 기도로 나는 오늘도 살아갈 힘을 얻는다. 엄마의 기도가 멈추는 날엔 나는 어떻게 될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부잣집 딸이었지만 일제강점기에 재산을 몰수당하여 많이 공부하지 못했지만, 주변에 대학 나온 할머니들에게 뒤지지 않는 지식과 학식의 여인이자, 세상의 모든 지혜를 품고 있는 지혜의 여인이다.

특히 대표기도를 하시던 엄마의 기도 소리를 잊을 수가 없다. 한 번도 종이에 적어서 하지 않아도 엄마의 기도 내용은 세상에서 가장 지혜롭고 박식한 온 세상을 아우르는 기도였다. 엄마의 드넓은 세계관에 언제나 놀라곤 했다. 가끔 우리 삼 남매, 특히 남동생이 영재였던 이유가 엄마의 두뇌를 닮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빠의 머리도 당연히 좋았지만, 큰 집이나 작은 집에 비해 조금은 그런 면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또한 엄마는 평생 멋쟁이셨다. 물론 사치를 하지는 않으셨다. 알뜰하셨지만 늘 엄마는 예뻤다. 그런 엄마가 자랑스러웠다.

지금도 교회에서 시니어 모델이라는 별명을 지닌 멋쟁이 엄마의 패션을 나는 결코 따라가지 못한다. 나는 늘 엄마 앞에서 여전히 주눅 드는 큰 딸이다. 지금도 철마다 내게 멋 좀 내라고 옷을 사주는 엄마. 그 엄마를 내가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딸이 엄마처럼 멋쟁이가 되길 그렇게 원하셨지만, 나는 이제껏 엄마의 소원을 이뤄드리지 못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서양식 양장으로 멋을 내고, 동네 사람들이 엄마가 사 입은 옷을 따라 사 입도록 만든 패션의 아이콘이셨던 그 엄마를 나는 결코 따라잡을 수가 없다. 예쁜 엄마를 둔 우리는 행운아였다. 복 받은 자녀가 아니었는가?


평생을 곱고 지혜롭게 신앙 가운데 자녀들을 양육하며 길러내신 엄마의 신앙 유산을 나는 오늘도 이어가고 있다. 엄마의 본을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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