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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한루의 봄밤

봄날의 여행

by 샨띠정

코끝을 간지럽히는 봄바람이 일기 시작하면 여자중학교였던 교실엔 사월 초파일 춘향제준비가 시작됐다. 때론 분홍색 한지로 얼마나 많은 꽃을 만들기도 하고, 가장행렬 역할을 위해 우스꽝스러운 옷을 입고 나름 예쁘게 분장을 하기도 했으니 봄은 그렇게 까르륵 거리는 소녀들의 웃음소리를 몰고 왔다.

그 시절 그때는 석가탄신일과 같은 날을 절기로 지키는 춘향제가 너무 커서 석가모니의 탄생 정도는 관심에도 두지 않았다. 남원의 가장 큰 연중행사이다 보니 고인이 된 소설 속 춘향이에게 제사를 드린다는 것까지는 염두에도 두지 않았다. 그저 아이의 눈엔 신나고 즐거운 볼거리와 이야깃거리로 가득한 축제장으로 비쳤으니까.


중학교 2학년 전체가 보통 2, 3일은 진행된 춘향제 행사에 가장행렬 인원으로 동원된 적이 있었다. 우리 반에서 춘향이를 뽑아야 한다고 해 몇몇이 후보에 올랐다. 내 이름도 올랐다. 당시만 해도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인 나는 행여라도 춘향이로 뽑혀 트럭 위에 올라타고 시내를 행진하게 될까 봐 숨이 멎을 정도였다. 다행히 예쁘장한 연숙이가 춘향이를 하기로 하고, 우리 반 전체 67명은 월매 분장을 준비했다. 장롱 속에서 엄마의 한복을 꺼내고 속바지를 챙겨 입고는 머리는 꽁지를 검은색 띠로 묶어 올렸다. 얼굴에도 엄마의 루즈를 발라 문질러서 우스꽝스러운 볼터치를 하고 입술도 빨갛게 칠했다. 어떤 친구들은 볼펜으로 주근깨를 볼에 그려 넣어 소녀들의 웃음보를 터트리고 말았다.


학교 앞에서 출발해 남원역을 지나 제일사거리를 건너고 시내를 다 돌고 돌아 광한루원까지 가장행렬을 이어갔다. 다리가 아픈 것도 부끄러움도 누구를 위한 것인지도 잊은 채로. 2학년 전체(8반 까지)의 무리 속에서 여중생 작은 소녀의 일상이 춘향제 속에 기록되었다.


그 후로 얼마나 긴 세월이 흘렀을까?

봄바람이라기보다는 차디찬 공기가 손을 시리게 하는 3월의 봄날, 봄밤에 그곳을 다시 찾았다. 낮보다는 야경이 아름답다 하여 광한루 근처에서 저녁을 먹고는 서둘렀다.


봄밤의 조명 불빛에 수려한 완월정이 연못 속에 퐁당 빠져 마주하는 모습은 우리 고유의 건축물에 감탄을 불러냈다. 물빛에 일렁이는 풍광이 예쁘고 고와서 한참을 넋 놓고 보았다. 마음은 이팔청춘 춘향이라도 된 듯 마냥.

조선, 그 오래전에 정철이 은하수를 담아 호수를 만들어 곱게 단청을 입힌 누각을 곳곳에 세워 두고, 군데군데 작은 섬들에는 꽃들을 가득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는 걸 보면 선조들이 꽤나 세련되고 멋스러우며 감각적이었다. 연못이 빠진 광한루원은 안고 없는 찐빵이 될 테니까.


연못이 비추인 완월정 앞에서 한참 동안을 머물다가 사랑의 다리 오작교를 걸어 광한루로 건넜다. 조선 선조 때 튼튼한 돌로 만들어진 오작교는 정유재란이 있던 때에 광한루가 다 불탔을 때도 그대로 남아 지금까지 원래 모습 그대로 보존되었다 하니 박수를 보내고 싶다. 현존하는 연못 안에 있는 다리 중에 오작교가 단연 규모가 가장 크다 하니 뿌듯하다. 오작교 아래로 흐르는 물결도, 그 위를 걷는 이들의 풍경도, 누각도 어느 하나 빠지지 않는다.


광한루는 남원으로 유배 온 황희 정승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데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지고, 현재는 인조 때 다시 건축하여 복원된 거라고 하니. 누각 아래 기둥 안 쪽으로는 일제강점기 때 감옥으로 사용되었다니 광한루의 시름도 꽤 깊어 보인다. 그래도 우리나라의 4대 누각 중(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 평양 부벽루)의 하나로 그 품위를 지키며 호수 위에 기개롭게 우뚝 서 있으니 어찌 자랑스럽지 않겠는가?


사진을 찍느라, 감상하랴, 얘기 나누랴 분주한 우리들 뒤로 어서 퇴장하라는 안내원의 소리가 들렸다. 10시에 닫는다고 알았는데, 초봄이라서 그랬을까? 8시에 문을 닫는다고 서둘러 나가라고 다그치는 바람에 나오는 문을 찾느라 분주해졌다. 서문으로 들어왔는데, 문을 닫았다며 정문으로 나가라고 하니 어쩐담. 그럼 우리가 머무는 숙소까지 택시를 타야 할 정도로 멀다고 가까운 문으로 나가게 해달라고 사정했더니 다행히도 동문을 열어줘서 달리다시피 광한루원을 빠져나왔다.


남원 사는 친구가 광한루 옆 한옥 호텔을 예약했다. 그저 할 일없이 마냥 광한루 근처를 걸어 돌아다니며, 어릴 적 추억이 깃든 요천수 천변도 밟아 보고, 중학교 교정도 살짝 들여다보고, 간식거리와 이야깃거리로 시간을 채우고 싶은 맘 그득했다. 언젠가 그럴 수 있는 날이 오겠지. 꿈을 하나 예약해 두고 왔다.

실제로 장작을 지펴 구들장을 데운 온돌방에 흰색 요를 깔고 보송보송한 이불을 덮고 친구들과 나란히 몸을 뉘었다. 예전엔 밤을 지새워 이야기꽃을 피우다 새벽에야 겨우 잠이 들었을 텐데. 수다를 떨다가 잠을 이기지 못하고 꿈속으로 빠져들어가 버렸다.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세월은 야속하게도 너무나 빨리 흘렀다.

그동안 사느라, 살아내느라, 모두 애썼다.

세월의 간극만큼 사이가 멀어진 건 아닐 게다. 그렇지 않길 바란다. 각자 살아온 날들이 고되고 힘겨웠으리라. 그래도 돌아보면 좋은 일도 많고, 웃을 일도 가득하지 않았던가.


날씨가 풀려서 방심했던 탓에 얇은 봄옷으로 치장하여 심한 꽃샘추위를 원망하던 3월의 짧은 여행을 추억한다. 고맙다. 오랜만에 얼굴 보며 안부 물을 수 있는 소꿉친구들이 있어서.


고속도로를 달려오는 길엔 함박눈이 덮쳤다.

봄은 봄인 듯한데, 이번 겨울은 미련을 떨치지 못하나 보다. 이별을 통곡하는 부르짖음으로 머리카락 휘저으며 날을 세우는 여인인 것만 같다. 이놈의 곱게 떠나지 못하는 겨울 모양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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