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촌 생활
이른 아침 인천공항에 도착한 그날, 뉴스를 통해 전 세계에 코로나 팬데믹이 선포되었다. 인도에서는 그리 심각하지 않던 코로나 19 상황에 우리는 마스크도 쓰지 않은 채로 비행기를 타고 왔다. 당시만 해도 인도 사람들이 강황가루(할디, haldi)를 많이 먹어서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력이 강하다고 부러워하던 터였다. 물론 다음 해에 무시무시한 코로나의 재앙이 인도를 덮치기 전까지만 그러했다. 나는 그날의 아픔과 공포, 죽음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이민가방을 들고 여권에 입국도장을 찍는 그 순간까지도 세상을 바꿔놓을 코로나 팬데믹에 대해 정확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였다. 우리는 희미한 가시적인 미래를 맞이하고 있었다. 고국 땅을 밟는다는 부푼 가슴을 누른 채, 어떤 연유인지도 모르고 그저 긴장하고 조심해야만 했다.
한국 학교를 한 번도 다녀본 적이 없는 딸아이의 학교 생활과 한국 적응을 위한 계획은 온라인 수업, 원격 수업이라는 덫에 걸리고 말았다. 선생님을 만나는 것도, 학교 교실에 앉아 친구들의 얼굴을 마주하기도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우리가 기대했던 아이의 학교 생활과 거리가 점점 멀어져만 가고 있었다.
도심 속 아이의 학교는 모든 게 완벽했다. 교실 환경과 시설, 교육과정, 꽃들이 만발한 예쁜 교정과 체육시설, 다양한 도서관과 서점, 예배실, 쾌적한 급식실까지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았다. 나도 딸아이의 학교 생활을 즐기며, 도서관과 서점을 들락거렸다. 교정의 벤치에 앉아 묵상하며, 떨어진 꽃잎을 카메라에 담았다.
근처 광교호숫가에 앉아 편의점에서 내린 따끈한 아메리카노를 마셨고, 북카페 책발전소에 들러 책구경을 하며 그 순간을 즐겼다. 아이는 자전거를 타고 등교를 하고, 산책로 자전거길을 달렸다. 집 근처 뚜레쥬르에 들러 빵 하나를 집어 들고 작은 행복을 느꼈다. 한국에서만 가능한 소박한 일상에 감격하면서 말이다.
2인 이상, 5인 이상, 8인 이상 모임 금지라는 정책에 따라 집 앞 공원과 하천가 산책로, 광교호수를 걷는 일이 고작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사이 우리는 '확찐자'가 되어 몸무게가 8~10kg이 더 불어나고 말았다. 그 이후로 여전히 그대로 몸매를 유지하고 있는 신비로운 인체를 주시할 뿐이다.
우리는 그렇게 그곳에서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누릴 수 있는 좋은 환경에 감사하면서. 코로나 상황이 더 악화되기 전 까지는 그랬다.
갈수록 나빠지는 팬데믹 속에서 우리는 고민하며 기도하기 시작했다. 8년이 넘는 인도 생활을 멈추고 한국에 와서 학교에 등교하지 못한 채로 머물 수는 없었다.
그러던 중, 홍천에 살며 학교에 근무하던 친구가 내게 꿀 같은 정보를 건넸다.
"시골 작은 학교는 돌봄 교실을 운영해서 원격수업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학교에 등교해. 우리 아이들은 계속 학교에 다니고 있어."
그때부터 나도 시골 작은 학교를 찾기 시작했다. 교육청에 들어가 모든 학교를 찾아 자세한 현황을 파악하고, 학교 운영과 분위기를 살피는 일에 열심을 냈다. 시골에 살 수 있을지 스스로도 몰랐고, 특히 남편이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지만 그것에 연연할 형편이 못 되었다. 어떻게든 한국 문화와 학교 생활을 잘 배우고 익힐 수 있는 작은 학교 찾기에 돌입했다.
눈에 들어오는 학교를 직접 찾아가 상담을 하고, 학교를 정하기까지 여러 분들의 도움을 받았다. 떨리고 두려웠지만 용기를 내어 도전해 보기로 했다. 마침내 가장 마음에 흡족한 숲 속 작은 학교를 찾아 전학을 시키기로 결정을 내렸다. 마음 깊은 곳에는 믿음이 자리했지만, 낯선 곳으로 이사해서 전학하는 일이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것도 도시에서 벗어난 시골 면 소재지에 있는 농촌지역으로 들어가는 일에는 크나큰 용기를 필요로 했다.
"우리 시골에 가면 강아지를 키우자."
딸아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마음에도 불안과 고뇌가 있었겠지만 강아지를 키울 수 있다는 엄마의 말에 무거운 짐을 다 내려놓았다. 그것은 오히려 감사한 일이지 않은가? 아이가 원하지 않았다면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을 테니까.
그렇게 나는 밤을 밝히는 네온사인 가득한 도시를 떠나 칠흑 같은 어둠을 맞이하는 시골로 들어왔다. 엄청난 결정이었다.
이곳에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놀라운 일들을 직접 두 눈과 몸으로 부딪히며 새로운 삶을 체득해 가고 있다. 자연과 가장 가까이에서 계절을 마중 나가 그 누구보다도 일찍 맞이한다. 지금도 나는 봄마중을 나가고 있지 않은가? 길가에 고개를 내민 초록 풀들을 보며 겨울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눈치채고 말았다.
집을 짓고, 북카페를 운영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무엇보다도 장군이와 꽃순이, 그리고 퍼지. 꽃순이가 낳은 일곱 마리 강아지들을 품에 안았다. 지금은 백설이 혼자만 남아서 우리와 함께 하고 있지만 말이다.
이곳에서 우리가 먹이주며 사랑으로 길렀던 8 마리 토끼들, 두 마리의 청계닭, 11 마리의 반려견들과의 삶을 선물로 받았으니 이 얼마나 경이로운가? 생각할수록 신기하고 놀랍다.
초등학교 졸업까지만 잠시 지내자고 들어왔다가 이리될 줄은 어느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인도에 우리의 짐도 그대로 정리해서 고이 잘 보관하고 있었으니까. 다시 인도로 돌아가게 될 거라 기대했었다.
그 후, 벌써 4년 반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이제 마치 이곳이 우리 고향이라도 된 듯, 토박이처럼 익숙하게 살아가고 있다. 하나하나 배워가면서.
수원에서 시골로 들어오기로 결정했던 우리의 결단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바꿔 놓았는지 모른다. 내 마음의 그릇도, 세상과 자연을 바라보는 눈도, 동물들을 대하는 마음과 창조주 하나님의 손길을 찬양하는 정도까지 그 깊이와 넓이가 달라지고 있다.
내 인생을 바꾼 가장 놀라운 결정이 아니겠는가? 지금도 그 모든 과정을 감사함으로 받아 안는다. 비록 모든 것이 완벽하지 않다 하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