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한 성품
펑펑 함박눈이 내렸다. 올 겨울은 유난히도 하얀 눈세상을 실컷 보게 된다. 눈 오는 풍경을 즐기고 나면 치워야 하는 쌓인 눈을 보며 한숨을 쉬어야 해도, 눈 오는 날은 기분이 좋다. 새하얗게 소복이 내려앉은 푹신푹신한 눈을 밟는 것도, 뽀드득뽀드득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도, 동물들이 지나간 흔적인 작은 발자국을 보는 것도 즐겁다. 비록 논 온 뒤의 뒷감당이 두렵기는 하지만 말이다.
나의 장점이자 내가 좋아하는 나는 꽤 유쾌한 성격이라는 것이다. 때론 고민하고, 시름에 빠질 때도 있지만 금세 탄력성을 가지고 벌떡 일어나곤 한다.
딸아이가 하굣길에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아 매번 내게 묻는다.
"엄마, 할 얘기가 있어. 좋은 거 먼저, 아니면 나쁜 거 먼저? 어떤 거 말할까?"
내 대답은 항상 이렇다.
"좋은 거 먼저 듣고 싶어. 빨리 좋은 거 얘기해 줘."
내게 있는 유쾌한 마음은 즐겁고 행복한 것을 추구한다. 내 마음엔 지우개나 성능 좋은 비누 같은 탁월한 세탁 세제가 장착된 거 같다. 화나고 속상하고, 짜증 나고, 미웠던 감정을 깨끗하게 씻어버리고 금세 마음이 좋아진다. 대체로 부정적인 감정을 빨리 없애는 능력이 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근심이 무겁고, 걱정거리가 많으며, 불행하고 외로운 사람처럼 느껴지다가도 그 감정에 그리 오래 머물지 않는다. 내 속의 유쾌한 감정이 살아나 그 모든 어두움을 몰아내는 경험을 수도 없이 해왔다. 나는 그런 내가 고맙고 좋다.
물론 그러한 면에 단점이 없는 게 아니다. 때때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몰두하거나 깊이 빠져있다가도 어느 순간 잊어버리고 마음 편하게 태평을 누리다가 후회한 적이 꽤 있다. 학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딸아이를 위한 염려가 깊어질 때는 심각하게 골몰하다가 또 금세 낙천적으로 마음이 편안해져버리고 만다. 긍정적인 마음으로 희망을 바라보면서도 내가 놓치는 부분이 많아 땅을 칠 때가 있지 않은가?
이런 유쾌한 성품은 사람을 좋아한다. 관계 속에서 마음이 상하고 화가 날 때도 있지만, 나는 시간이 지나면 미워하는 마음이 깨끗하게 사라진다. 그러니 내겐 불편한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 있다면 잠시 동안의 마음 아픈 순간만 있을 뿐이다. 그러니 싸우고 나서도 아무런 나쁜 감정이 남지 않는다. 그건 내가 봐도 신기하다.
지난 얼마 동안 담낭(쓸개) 제거 수술을 하게 될 거라는 생각에 병원을 들락거렸다. 처음 원장님께 수술을 해야 한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는 눈물이 났다. 복부 CT 검사를 할 때도 주삿바늘이 나를 아프게 찌를 때도 눈시울을 적시며 누워있었다. 그러나 검사 결과를 기다리면서 슬픔은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이미 나는 수술을 준비하며 마음이 평안해져 있었다. 심지어 오늘 눈길을 운전해서 병원에 가는 길도 가벼웠다. 결과가 어떠하든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내 마음은 이미 긍정으로 보호되고 있었다.
감사하게도 복부 초음파 검사에서는 담낭의 결석이 두 개가 겹쳐서 찍히는 바람에 더 커 보였는데, 복부 CT 검사 결과는 훨씬 작게 나왔다. 수술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다. 얼마나 감사하던지 미소가 절로 튀어나와 함박웃음을 지었다.
"췌장도 깨끗하네요. 방광이랑 신장도 아무 문제가 없어요. 아주 다행이에요."
일단 담낭(쓸개)을 지켜봐야 하니 1년 후, 3월 2일에 복부 CT 검사 예약을 잡았다. 마음이 함박눈처럼 가볍게 날아올랐다. 기쁜 소식을 기도해 준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알렸다. 좋은 소식을 전할 수 있으니 얼마나 복된 날이던가?
"괜찮을 거 같았어요. 왠지 느낌이 그랬어요. 너무 다행이에요. 이제 운동하고 몸관리 잘해요."
일본 여행 중에 있는 재* 씨가 아침부터 결과 잘 보고 오라며 걱정해 주고 챙겨주더니, 내가 전해 준 좋은 소식을 듣고는 내 자신처럼 기뻐하며 위로했다.
"오래 사용한 기계 망가지듯 사람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 닦고 조이고 기름치면 기계도 오래 쓰잖아. 사람도 그래야 하나 봐. 그니까 넌 지금부터 네 몸 아끼고 검진받으면서 닦고 조이며 기름치며 시기를 지연시켜야지."
날 걱정해 주던 선*언니가 다정한 마음의 조언을 건넸다. 행복하다.
어쩌면 나는 내가 아팠었다는 사실도 기억하지 못하는지 모르겠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평온하다.
사람들을 만나면 유쾌한 목소리로 즐겁게 대화하며, 에너지를 뿜어내는 나를 나는 좋아한다. 수많은 단점이 있다 해도 나를 이끌어 나가는 나의 유쾌한 성품과 느긋함으로 인해 지금의 내가 지금 이곳에 있지 않을까?
그 작은 모습이 나를 성장시켜 왔다고 나는 믿는다.
할머니가 되어도 유쾌한 웃음과 대화로 꽃을 피우는 삶으로 생을 마감하고 싶다.
기쁘고 행복하고 감사한 날이다. 비록 지금 내가 여러 무거운 인생의 짐들을 지고 있을 지라도.
강물 같은 평화를 허락하신 주께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