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심이 걸린 영어 발음

자존심

by 샨띠정

'991063...'으로 시작되는 나의 인도 전화번호는 매번 나를 당황스럽고 곤란하게 만들었다. 바로 중간에 끼어있는 '3'때문이다.

"What is your contact number?"

내게 전화번호를 물어올 때마다 참 곤란했다.

이 질문 때문에 퍽 자존심이 상할 때가 많이 있었다.


인도의 관공서나 주요 기관에서는 거의 공용어인 영어와 힌디어를 사용했다. 특히 외국인들에게는 당연히 영어를 주로 사용한다. 그런데, 한국 사람이 한국식 영어 콩글리쉬를 쓴다면, 인도 사람들은 힌디어식 영어 힝글리쉬를 사용한다.


처음 인도에 갔을 때는 영어를 사용하지만 알아듣기 어려운 인도식 영어에 적응이 잘 안 되었다. 물론 나의 한국식 영어도 별 다를 바 없었지만, 처음 힌디어를 전혀 몰랐을 때는 의사소통하는데 참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딸아이는 인도에서 도미노피자를 좋아해서 가끔 전화로 피자를 주문하곤 했는데, 매번 전화로 주문할 때마다 나의 전화번호 때문에 애를 먹었다.


인도 도미노피자의 시스템은 전화번호를 불러주면 주문하는 집의 주소가 자동으로 연결되며 주문되는 거라 매번 내 전화번호를 불러줘야만 했다. 왜 자동 기억을 못 하는지 지금도 아날로그 시스템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피자 주문을 마치고 나면 내게 질문이 날아온다.


"전화번호가 뭐예요?"

"더블 나인 원 지로 식스 쓰리....(991063...)"

"Pardon?"(뭐라고요?)

"쓰리..."

"Pardon?"(뭐라고요?)

다시 나는 다른 발음으로 시도해 본다.

"뜨리..."

"Pardon..?"(뭐라고요?)


도대체 '뜨리'와 '쓰리'의 그 중간 발음은 왜 그토록 어려운지 모르겠다.

우여곡절 끝에 도미노피자 직원이 나의 숫자 '3'을 알아들으면 주문은 성공적으로 끝나고 치즈 마가레타 피자를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아, 정말 인도의 도미노피자에 대해서도 쓰고 싶은 에피소드가 너무 많다.)


나는 속으로 불평을 하면서도 자존심이 상하곤 했다.


'도대체 내 영어 발음이 어때서 못 알아듣는 거지? 자기들 발음도 별로면서...'


인도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칠 때도 비슷한 경험을 여러 번 했다.


한국어 어휘를 이해하지 못하는 인도 학생들에게 영어로 한국어 어휘를 설명해주면, 한 번에 내 영어 발음을 알아듣지 못하고 멀뚱히 날 쳐다보거나, 키득키득 웃는 학생들도 있었다.


학생들 앞이라 부끄러움을 다 표현할 수도 없고, 얼굴이 화끈거리고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리면서, 손에 땀을 쥐며 어쩔 줄 몰라하던 때가 여러 번 있었다. 친한 학생들과는 서로 영어 발음을 놓고 실랑이를 하며 서로의 발음이 맞다고 우길 때도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인도에서도 미국인들과 교제할 기회가 많이 있었는데, 역시 나의 영어 실력 때문에 자존심이 상할 때가 여러 번 있었다.


인도 사람들도 영어를 잘하면 괜히 우쭐하거나, 영어를 못하는 사람을 대놓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인도 사람들은 외국인들에게는 영어로 대화를 시도하곤 한다. 어차피 인도 사람들에게는 원어민이 아니기에 문법 신경 안 쓰고 막 쓰는 영어를 사용하다가, 정작 미국인들과 대화할 때는 문법까지 생각해서 대화를 이어가야 하기에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한 번은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며 모여서 게임을 하던 때인데, 쪽지에 쓰인 영어 단어를 보고 몸짓으로 단어를 설명하고 무엇인지 알아맞히는 게임이었다.

내 차례가 돌아왔고 나에게 하얀 쪽지 하나가 주어졌다. 떨리는 마음으로 쪽지를 펼쳐보니 단어가 하나 쓰여 있었는데,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은 게 아닌가?


사람들의 눈은 모두 나를 향해 있었고, 나의 몸짓 설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내 몸은 얼음처럼 얼어붙어 버렸고, 입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저 혼자 속으로 나 때문에 분위기가 망쳐질까 봐 걱정만 될 뿐이었다.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던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나는 결국 이렇게 무너지는구나. 나는 이거밖에 안 되나 보다.'라는 생각이 가슴을 옭아매고 있었다.


지금도 그 단어를 기억하고 있다. 그때의 영어 단어는 '오너먼트(Ornament)'였다.


다행히 게일이 괜찮다고 하며, 얼른 다른 쪽지를 가지고 본인이 순서를 있어가는 바람에 게임은 계속 진행되었지만 웃고 있는 내 얼굴은 웃는 게 아니라 엉엉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영어가 뭔지, 내 자존심을 그토록 상하게 하다니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나 스스로를 참 힘들게 했던 시간이었다.

인도 맥도날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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