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안 타임보다 훨씬 강도가 심한 인디언 타임은 성격이 느긋한 편인 나 조차도 적응하는데 어려움이 컸다. 숨 넘어가는 인디언 타임은 수년을 살아도 여전히 감당하기 어려운 과제 중의 하나였다.
나도 사실 약속 시간 전에 미리 도착해서 기다리는 스타일이 아니다. 거의 시간에 맞춰서 움직이다 보니 중간에 변수가 생기면 늦을 때도 종종 있는 편이다.
내 속에는 쓸데없는 이기심이 자리 잡고 있는 듯하다. 왠지 약속한 시간보다 미리 나가 있으면 내 시간을 도둑맞는 느낌이 있어서 딱 시간에 맞춰 움직이는 나쁜 습관이 있다 보니 도리어 내가 약속 시간에 늦어서 다른 사람의 시간을 도둑질할 때도 많다.
누군가와 약속을 하고 시간을 정하는 건 사소한 것들까지도 모두 소중하다. 기한 내에 서류를 내는 것도, 회의나 수업 시간, 식사나 모임의 약속은 어느 것 하나 제외할 것 없이 중요하다.
그래서 나도 한번 정한 약속은 뒤집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며, 부득이하게 약속을 변경해야 할 경우는 상대방도 이해가 되며 동의가 되는 상황에서만 양해를 구하곤 한다.
가끔 설레며 기다리던 약속이 일방적으로 취소가 되거나 뒤집힐 때는 자신이 부인되거나 작아지는 듯한 썩 불쾌한 마음까지 들 때도 있는 게 사실이다. 어쩌면 상대방에게 나 자신이 그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부득이하게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경우도 분명히 있다.
인도에서 한국에서 가져간 냉장고가 고장이 난 적이 있었다. 한국의 폭염보다도 훨씬 심한 무덥고 찌는 듯한 델리의 날씨에 냉장고가 고장 나면 음식이나 야채들이 금방 상해버리고 만다. 시간과의 싸움이 생존과의 싸움 같기도 하다.
인도의 삼성 서비스 센터에 연락을 했더니 엔지니어가 다녀가며 한국 냉장고는 부품이 없어서 고칠 수가 없다고 했다. 대신 근처 지역 전기제품 수리점에 연락을 해보라며 귀띔을 해주었다.
그때부터 냉장고 수리와의 전쟁 같은 고통이 시작되었다. 인터넷으로 찾은 냉장고 수리 전문 센터에서 집으로 와서 우리 냉장고를 보더니 고칠 수 있다고 했다. 장비를 챙기고 부품을 사 와야 한다며 다시 오겠다고 약속을 하고 나간 수리 기사가 다시 오지 않았다. 전화를 하면 오후에 오겠다. 다시 내일 오겠다. 또다시 오후에 오겠다. 또 다음날 오겠다...
결국 다른 수리 센터에 연락을 해서 다른 사람이 왔다. 역시 부품을 사서 다시 오겠다고 했다. 그리고 약속한 시간에 수리 기사는 오지 않았다. 나는 오기가 생겨서 전화를 했다. 2시에 온다고 했다. 어쩌면 나는 2시에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기다렸다. 역시 아무도 오지 않았다. 다시 전화를 했더니 내일 아침에 오겠다고 한다. 그렇게 일주일이 흘렀다.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주르륵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혼자 중얼거렸다.
'차라리 못 온다고 말하면 기다리지 않았을 텐데, 왜 고칠 수 있다고, 오겠다고 약속을 할까?'
냉장고 없이 무더위에 일주일을 버티기가 너무 힘들었다. 일주일을 기다리다가 인도에서 생산되는 작은 LG 소형 냉장고를 구입했다.
그렇게 작은 새 냉장고로 반찬과 야채를 넣어 사용하던 어느 날, 감사하게도 다른 수리 기사가 우리 집 냉장고를 고쳐주며 냉장고 사건은 마무리가 되었지만 지금도 그 고통의 시간을 잊을 수가 없다.
인도 사람들의 결혼식이나 식사에 초대받으면 기본으로 두 시간은 기다려야 시작한다. 두 시간쯤 지나서야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내며 시작할 분위기가 조금씩 보이는데, 이미 우리는 기다리다가 지쳐 예식이 시작됨과 동시에 주인공의 얼굴만 보고 집으로 돌아올 때가 허다했다.
아무도 이런 이야기를 믿으려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겨울에 인도 결혼식(인도는 주로 겨울이 결혼 시즌이다.)에 초대를 받아 인도의 전통 의상인 사리를 입고 간 적이 있었다. 숄을 가져가서 뒤집어쓰고 있었지만, 신랑 신부를 기다리던 그 두 시간 동안 정말 너무나도 춥고 힘겨운 시간이었다.
그 뒤로는 일부러 초대장에 적혀있는 약속 시간보다 두 시간을 늦게 가서 참석한 적도 있었는데, 그때마저도 1 시간 이상을 기다려서 주인공을 만나 기념사진을 찍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온 적도 있었다. 대부분 인도의 파티나 예식은 한밤중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도의 시간관념은 그저 단순하게 쉽게 판단할만한 것이 아니라 힌두교의 역사와 정신, 힌두 문화에서 내려왔다고 한다. 물론 내 생각에는 기후와도 상관이 있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