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버의 <사랑을 말할때 우리가 이야기 하는 것>을 변주하여..
며칠 전 SNS에서 익명의 여학생이 올린 글 하나를 읽었다. ‘전역 후 복학한 과 선배와 밥을 한번 먹었는데 그때부턴 매일 연락하고 보자고 해서 귀찮아 죽겠다’는 식의 하소연이었다
.
그러고 보면 위와 같은 사례는 이제 ‘연애에 서툰 복학생’이란 이름으로 SNS 사용자들 사이에서 개그코드화 되는 추세다. 먼저 톡을 해놓고도 우물쭈물 거리고 남자(혹은 여자)와 서릿발 같은 단답형 문장으로 일관하는 상대 여자(남자)의 대화를 캡처해 올리고, 사람들은 그걸 보고 웃으며 좋아요를 누르는 식이다.
나 역시 저런 류의 이미지를 보고 웃은 적이 있다. 하지만 2초도 안 되는 피식거림이 지나간 후에는, 마음 한편에서 먹먹한 씁쓸함이 베어 나오곤 한다. 오늘의 주제는 바로 ‘짝사랑’이다.
사랑은 ‘오는’ 것이다.
전역 후, 길거리에 널려있는 커플들의 모습이 하나같이 어여쁘다. 그 역시 신발 밑창이 닳도록 이 모임, 저 모임으로 하나뿐인 사랑을 찾아 나서지만 결국 다 허사다. 오늘도 공연한 술만 진탕 마시고 돌아오는 막차 버스 안, 이곳만은 아니리라 예감한 그곳에서, 일면식도 없는 옆 좌석 여자와 눈이 마주쳤고, 그의 심장은 바보처럼 요동치기 시작한다. 그렇게, 사랑은 ‘온다’.
하지만 문제는 이 사랑이 대부분 일방향적 이라는 사실이다. 오죽하면 한 연애 고민 게시글의 댓글 중 추천수 1위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나를 사랑해 주는 기적이 일어났으면...’일까. 그만큼 가슴속에 멋대로 눌러앉은 그 사람을 힘에 겨워하는 이가 많다는 뜻이리라.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이 내게는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는 비극, 짝사랑은 많은 경우, 사람을 비참과 우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다.
“나도 알아 나의 문제가 무엇인지
난 못났고, 별 볼일 없지.
그 애가 나를 부끄러워 한다는 게
슬프지만 내가 뭐라고
빛나는 누군갈 좋아하는 일에
기준이 있는 거라면
이해할 순 없지만 할 말 없는 걸
난 안경 쓴 샌님이니까...“
- 10CM, <스토커> 중
애틋하다 못해 시린 나의 눈빛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냥 해맑게 내게 손을 흔드는 그녀. 행여나 눈이 마주칠세라 대강 손을 흔들고 고개를 푹 숙이고 마는 내가 한심하다. 이 마음을 지고 사는 것이 버거워 그만 포기하려고도 했다. 허나 매번 뜻대로 되지 않는다. 독하게 마음먹고 그녀의 카톡을 숨김 처리한지 3시간 째, 자존심도 없는 나는 또 다시, 뭐하냐고 그녀에게 톡을 보내고 있다.
그렇다. 사랑은 언제나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 잠 아니면 침대에 누웠을 게 뻔한 시간에 자꾸만 뭐하냐고 연락하게 되고, 두 번, 세 번 거절당해도, 자존심도 없는 사람처럼 계속 만나달라고 조르게 된다. 그 아이가 별 의미도 없이 건넨 콜라 한 캔에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이 들고, 장난으로라도 흘깃 노려보는 순간에는 심장이 멎는 것만 같다.
그러니, 자꾸만 당신을 귀찮게 하는 그, 혹은 그녀를 너무 한심하게는 바라보지 말았으면 한다. 그라고 자존심이 없었을까? 몇 번이고 거절당하는 게 아무렇지도 않았을까? 아니다. 그 역시 자존심을 내려놓는 게 죽기보다 싫고, 거절당할 때면 우울하고 무력해 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저 당신에게만은, 자존심을 내려놓고 만다. 그렇게 해서라도 가까워지고 싶으니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그런 거니까.
그가 정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에둘러서라도 그에게 직접 표현해주기를. 대화창을 캡처해서 친구끼리 돌려보거나 SNS에 게재하는 대신에 말이다.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그가 자존심을 꺽은 건 당신과 조금이나마 가까워지기 위함이지, 웃음거리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 테니까 말이다. 다시 한 번, 이 죽일 놈의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