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언 Oct 17. 2017

영화 <폭스캐처>: 여우를 쫓던 남자의 유서

엄마만 죽으면 끝날 줄 알았어

출처 = 영화 <폭스캐처> 스틸컷

 어머니만 죽으면 될 줄 알았어요. 정말이에요. 어머니만 없으면 레슬링복을 입은 나를 경멸하는 그 눈빛을 보지 않아도 되니까요. 듀폰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를 그런 눈빛으로 볼 수 있는 건 정말이지 어머니뿐이에요. 어머니만 없으면 나는 우리 폭스캐처 농장 마구간을 가득채운 경주마들을 개활지로 쫓아낼 수 있을거예요. 어머니는 슬퍼하겠죠? 당신은 먹고 싸고 달리기 밖에 못하는 그 짐승들을 나보다 더 사랑했으니까요. 지금쯤 당신의 경주마들은 어떤 보살핌도 받지 못한 채 황야를 떠돌고 있겠네요. 이미 땅속에 묻힌 당신은 아무 말도 못하겠지만.


 어머니가 레슬링을 두고 "천박한 스포츠"라고 했던 날을 기억해요. 고상한 당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혹평이었겠죠. 내가 레슬링을 사랑한다는 걸, 레슬링에 내 모든 노력을 쏟고 싶었다는 걸 당신은 잘 알고 계셨죠. 너무 잘 알고 있었으니까 어머니는 부러 그렇게 말한건지도 모르겠어요. 듀폰 가문의 후계자가 젖꼭지가 다 드러나는 타이즈를 입고 매트 바닥에서 뒹구는 건 체통 떨어지는 일이니까요. 내 미래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그건 좋지 않다고 생각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요샌 가끔 그런 예감이 들어요. 어쩌면 어머니는 내 행복 같은 건 존나 안중에도 없지 않았을까라고. 그냥 당신의 아들이 레슬링처럼 병신 같은 스포츠에 매료된 게 거슬렸던 건지도 모른다고. 그러니까 아들이 땀 흘려 따온 레슬링 트로피 중 단 하나도 당신의 트로피 전시장에 전시하지 않았겠죠. 단 하나도. 시발 그래도 그렇지, 당신은 나한테 그러면 안됐어. 이런, 죄송해요. 상스러운 말을 써버렸네요. 용서하세요.


출처 = 영화 <폭스캐처> 스틸컷 / 좌 : 데이빗 슐츠 , 우 : 마크 슐츠


 1986년, 나는 레슬링팀을 만들었어요. 보조 코치로는 데이브 슐츠, 주전 선수는 마크 슐츠를 영입했어요. 전설이 된 형제죠. 한 집안에 한 명 나올까말까 한 올림픽 레슬링 금메달리스트가 한 세대에 두 명이 나오다니. 주전 코치는 당연히 나죠. 나에겐 비전이 있거든요. "위대한 레슬러와 동시에 좋은 시민을 양성한다". 대단하지 않아요? 나는 데이브와 마크의 멘토예요. 그치들은 내가 없었다면 시골 초등학교를 전전하며 시간당 20달러짜리 특강만 하다 죽었을 테니까. 그들이 성취한 업적은 전부 나로부터 기인한 겁니다. 어때요? 이제 아들이 좀 달리 보이시나요 어머니? 네?


 딱 한번, 어머니가 팀 훈련장에 오셨던 적이 있었죠. 선수들은 원을 그리며 구보중이었어요. 당신과 눈이 마주치자 나는 다급해 졌어요. 능력을 증명할 기회가 왔음을 직감했어요. 나는 선수들을 집합시켰고, 한명을 불러내 기술 시범을 보이기 시작했어요. 파테르 시범을 보이기 위해 바닥에 엎드렸을 때, 당신은 이미 나가고 없더군요. 어딘가 내 인생을 닮지 않았나요? 당신은 경주마들을 바라보고 있고, 나는 당신이 언젠가 봐줄 거라는 믿음 하나로 먼지구덩이 바닥에 엎드려 언제까지고 버르적거리는...


출처 = 영화 <폭스캐처> 캡처


 국가대표 선발전이 있던 날 경기장에서 나는 당신의 부음을 들었어요. 나는 곧장 폭스캐처 농장으로 돌아갔죠. 거기에서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이 뭔지 알아요? 마구간으로 달려가 말들을 가둔 빗장을 전부 열어 젖혔어요. 이 멍청한 놈들은 문을 열어줘도 밖으로 나올 생각을 않더군요. 소리를 지르고 손을 흔들어가며 나는 말들을 마구간 밖으로 쫓아냈어요. 놈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마구간으로 다시 들어오려 하더군요. 문을 가로막고 소리를 질러도 놈들은 자꾸만 돌아왔어요. 마치 유령처럼.


 나는 매년 50 달러를 레슬링협회에 기부하기로 했어요. 올림픽 국가대표팀을 폭스캐처 농장에서 합숙시키며 훈련시키는 조건이었죠. 협회 관계자들은 몸둘바 몰라하며 존경을 표하더군요. 하긴, 누군들 그러지 않겠어요? 나는 존 E 듀폰이고, 위대한 레슬러들의 스승이자 멘토인 걸요. 나야말로 훌륭한 시민입니다. 이제 세상에 인정받을 차례였죠. 그럼 어머니도 나를 인정했겠죠. 분명히.


 헌데 데이빗 슐츠. 이 오만한 은 끝까지 고개를 쳐들더군요. 나의 위대한 비전과 철학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촬영 때 "존 듀폰은 나의 멘토입니다"라는 대사를 끝까지 못마땅해 했다고 해요. 그놈은 내가 겉멋만 든 뜨내기 레슬러라고 생각하나봐요. 어찌저찌 촬영은 마쳤다고 전해 들었는데 어찌나 억지로 대사를 쳤는지 최종 방송본에서는 빠졌더라고요. 이 은혜도 모르는 짐승 새끼. 내가 어떤 고독과 서러움 끝에 지들을 지원하는지 모르는 놈.


                                                           출처 = 영화 <폭스캐처> 캡처


 그래서 어떻게 했냐고요? 어쩌긴요. 차를 몰고 그놈 집앞으로 가서 리볼버로 쏴죽여 버렸죠. 옆에서 꽥꽥 거리던 놈의 아내도 쏘려 했는데 금세 집 안으로 숨더라고요. 날쌘 년. 그렇게 은혜도 모르던 짐승 놈은 눈밭에 쓰러져 내 총알에 뒈졌고, 나는 3급 살인죄로 현재 수감중입니다 어머니.


 가끔 독방에 누워 어머니와 어머니의 경주마들을 생각해요. 마굿간을 열고 쫒아냈지만 유령처럼 자꾸 돌아오던 그 말들 말이에요. 살아계실 때, 따스한 믿음을 동반한 눈빛으로 어머니는 훈련중인 말들을 바라보았죠. 그것들이 길가에 똥을 갈겨도, 악취가 진동해도 어머니는 그저 흐뭇해했어요. 어쩌면 내가 되고 싶었던 건 레슬러가 아니라 그 경주마들이었는지도 모르겠어요. 나는 그냥... 인정받고 싶었거든요. 정말이지 그게 다였어요 어머니.


 어제 교도소 의사를 만났어요. 병이 도져서 더는 손 쓸 수가 없다더군요. 죽는 건 별로 두렵지 않아요. 정말 두려운 건, 혹시 지하에서 어머니를 만났을 때 어머니의 눈에서 경멸의 눈빛을 읽게 되는 순간이에요. 죽어서까지 나는 인정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건 정말... 차라리 팔 하나를 도려내는 게 덜 고통스러울 거라는 생각까지 듭니다.


 곧 뵙겠네요. 다시 뵐 땐 부디 제가 따온 트로피를 자랑러워 해주세요. 사랑하고 증오하는 나의 어머니.


                                                                                                                                                                                                                                                          존 E 듀폰 씀



P.S 영화 <폭스캐처>는 미국 재벌 존 E 듀폰이 레슬러 데이빗 슐츠를 권총 살해한 실화를 기반으로 만들어졌습니다.

P.S2 이 글은 영화 <폭스캐처>의 주인공 존 E 듀폰(스티브 카렐 분)의 시점에서 쓴 픽션이며, 글의 내용은 영화의 줄거리에서 그대로 차용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 <나의 엔젤> :능히 보는 사랑에 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