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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언 Oct 03. 2017

영화 <나의 엔젤> :능히 보는 사랑에 관하여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아?"
"네... 미안해요."
"날 사랑하지 않으면... 난 존재하지 않아"

                                                                                                                  - 영화 <버드맨> 중     


출처=영화<나의엔젤> 스틸 이미지


 아버지는 마술사였다. 그는 무대 위 허공에 세워진 문을 열고 들어간다. 여자 파트너가 뒤 따르지만 그는 이미 연기처럼 증발했다. 주특기인 '사라지기' 마술이다. 사라지기가 특기이던 마술사는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조수를 정신 병원에 남긴 채 정말 사라져 버렸다. 마술사의 아내는 간호사가 달려오지 않을 만큼의 비명 크기를 계산하며 아들을 출산해야 했다. 젖은 울음을 토해내는 아들을 그녀는 볼 수 없었다. 그녀의 아들은 투명 인간이었다.     


 황량한 정신 병동에서 그녀는 아들을 기른다. 텅 빈 포대기를 들고 어르는 모습이 어색하지만 괜찮다. 정신 병원에서 환청과 환시는 감기처럼 흔하니까. 흙 묻은 손으로 으깬 감자를 집어먹는 아들을 훈계해도 타인이 볼 땐 환각과 유희하는 정신질환자에 불과하다. 엄마는 그곳에 있되 볼 수는 없는 아들을 '나의 천사(이하 엔젤)'라고 불렀다.     


출처=영화<나의엔젤> 스틸 이미지


" 가끔 궁금해요 엄마. 거울 속 자신을 보는 느낌은 어때요? "     


 투명인간을 모티브로 한 영화 속 주인공들을 우리는 이미 여럿 알고 있다. 투명망토를 뒤집어쓴 해리 포터(<해리 포터> 시리즈)가 그렇고, 절대 반지를 낀 프로도(<반지의 제왕> 시리즈>)가 그렇다. 주인공들은 투명 인간의 힘을 빌어 절체절명의 위기를 모면한다. 칼과 창이 부딪히는 전장에서 투명인간화는 완벽에 가까운 무기 또는 전략으로서 기능한다.     


 과학자들에 따르면 투명 인간은 타인은 물론 자기 자신의 모습도 볼 수 없다. 인간은 눈을 통해 들어온 빛을 망막에 투사시켜 사물을 보기 때문이다. 망막이 투명한 투명 인간으로선 그 어떤 빛도 망막에 맺히게 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투명 인간은 아무것도 볼 수 없다.     


 영화 <나의 천사>가 이전의 두 영화와 다른 점은 투명 인간의 '정체성(identity)'에 주목한다는 점이다. 엔젤은 타인이 보는 '거의 모든 것'을 똑같이 볼 수 있다. 출렁이는 나뭇잎의 춤과 샛노란 햇살을 그는 볼 수 있다. 엔젤이 볼 수 없는 건 오직 하나, 자기 자신뿐이다. 엄마와 나란히 거울 앞에 서보지만 거울 안에 비치는 건 엄마뿐이다. 당연하다. 투명 인간은 보이지 않으니까. 엔젤은 자기가 어떻게 생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우리는 나는 내가 가장 잘 안다고 확신한다. 상식에서 비롯한 확신이다. 나와 가장 오래 산 건 나니까. 나는 어떤 성격과 가치를 지닌 사람이라는 견고한 자아상을, 우리는 상아 묵주처럼 고이 모시며 산다. 월요일 출근 버스를 향해 걷는 내 뒷모습이 어떤지, 자전거를 타다 굴러 생긴 목 뒤 상처가 얼마나 흉졌는지 본 적 없는 우리는 그렇게만 '믿고' 산다. 내가 했다고 믿을 수 없는 행동들을 우리가 종종하는 이유는 그에 대한 반증일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생각보다 무지하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거울 앞에서도 자신을 볼 수 없는 엔젤과 다를 바 없다 하겠다.   

  

출처=영화<나의엔젤> 스틸 이미지


 사랑은 유심히 보는 것이다. 아무도, 심지어 본인조차 주목하지 않는 상대의 버릇을 유심히 보고 기억하는 일에서 사랑은 발화될 것이다. 물어뜯는 당신의 엄지손톱이 얼마나 울퉁불퉁한지, 멀어지는 당신의 등이 종종 위태롭다는 걸 기억하는 이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 말해도 좋을 것이다. 유심히 보아온 누군가를 통해 우리는 나도 모르던 나의 퍼즐 조각을 맞춰 나간다. 본 적 없는 나의 엄지손톱과 뒷모습을 그의 눈을 통해 본다. 엔젤에게는 눈먼 소녀 마들렌이 그렇다.   

  

 엔젤에게 앞이 보이지 않는 마들렌은 –어머니 사후에 – 자신을 가장 유심히 봐주는 사람이다. 엔젤의 목소리 톤은 어떤지, 체취는 어떤지... 하나하나를 전부 세포에 새기듯 집중해야만 마들렌은 간신히 엔젤을 인지할 수 있다. 무엇 하나 볼 수 없는 소녀였으므로 더욱 유심히 보고 들어야만 했다. 그렇게 '무엇도' 볼 수 없는 마들렌은 '누구도' 볼 수 없는 엔젤을 보는 유일한 사람이 된다. 사랑해서 유심히 봤고, 유심히 보았으므로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출처=영화<나의엔젤> 스틸 이미지


 도시에서 각막 기증을 받은 마들렌은 수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다. 그녀는 그리워하던 엔젤과 마주했으나 마들렌은 엔젤을 볼 수 없었다. 마들렌은 '보이는 자들'의 세계로 편입해 들어갔고 엔젤은 투명인간인 그대로 마들렌을 기다린 까닭이다. 괴로워하던 엔젤은 마들렌에게 이별을 고하고, 마들렌은 그런 그에게 고백한다.     


 "같이 있자. 널 볼 수만 있다면 이깟 눈 따위 버려도 좋아"      


 대부분의 감각 기관처럼 시력은 수동적이다. 눈을 뜨고 있으면 시야에 있는 풍경이 무절제하게 쏟아져 들어온다. 그렇게 무심하게 우리는 세상을 본다. 각막을 기증받은 후부터 눈을 버리겠다는 선언 전까지의 마들렌은 '남들처럼' 엔젤을 보려 했다. 상대의 형상과 형체를 보려 했고,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성급히 절망했다. 눈 감았을 때 유심함을 그녀는 망각한 듯 보였다. 눈을 버리겠다는 선언은 더 이상 너를 볼 때 '남들이 보듯' 바라보지 않겠다는 고백과 다름 아니다.     


출처=영화<나의엔젤> 스틸 이미지


 마들렌은 눈을 버리지 않았고, 엔젤은 마들렌이 낳은 아이의 아버지가 된다. 아이는 다른 이의 눈에 보였고, 선명하고 예쁜 눈망울을 가졌다. 사랑하는 이를 보는데 필요한 건 눈이 아닌 '유심한 시선'임을, 가족사진 속 마들렌과 엔젤은 깨달은 듯 보인다. 눈 떠도 볼 수 없는자와, 감아도 능히 보는 자의 차이는 상대를 유심히 보려는 의지의 차이라고 영화 <나의 엔젤>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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