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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언 Sep 21. 2017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괜찮아, 넌 예외니까

알렉스와 지지의 경우



 어중간하게 친한 사람들이 술자리에서 나눌 이야기는 많지 않다. 학부 때 전공은 서로 다 알고 있고, 불면의 밤을 물들이는 고민을 나누기엔 관계가 얕다. 취미 얘기가 그나마 낫지만 이것도 유별난 한둘을 빼곤 대동소이하기 마련이다. 혜화동 파스타가 맛있다더라, 잠실역 인공암벽이 할인한다더라 정도의 정보 공유가 끝나면 예고된 침묵이 찾아온다. 침체된 분위기에 활기를 줄만큼 내밀하면서도 너무 심각하지 않은 주제가 절실해진다. '이상형' 이야기가 등장할 시간이다.


 이상형은 호감을 느끼는 이상적인 조건들의 목록이다. 누군가는 그녀의 피부톤과 눈매를 말하고 또 누군가는 그의 떡 벌어진 어깨와 아빠처럼 자상한 성격을 든다. 좋은 것을 말할 때 사람들은 말이 많아지므로 술자리는 다시 활기를 띤다. 과감한 몇몇이 지금의 이상형을 형성하고 떠난 옛 애인의 사연까지 곁들이면 좌중은 불콰하게 달아오른다. 그렇게 흥청망청해진 밤이 저물어 갈 것이다.


 실속없이 취해버린 밤. 집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오늘 오갔던 이야기들을 곱씹어 본다. 평소에는 발음조차 해본 적 없는 "이상형"을, 분위기에 휩쓸려 멋대로 지껄였다. 상냥하고... 눈이 크고... 스쳐간 애인들의 면면이 떠오른다. 전에 걔가 상냥했나? 아니면 그전 친구는? 아니라고는 못하겠지만 그렇다고도 못하겠다. 애인들은 각자의 이름으로 유일한 카테고리를 이룬 채 사라졌다. 청순하다, 눈이 크다 따위의 수식어로 그들은 분류되지 않았다. 유아독존(唯我獨尊) 했던 시절들이었다.




출처 = 영화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캡처


 오늘도 지지(지니퍼 굿인 분)는 사랑에 실패했다. 정확히는 사랑인 줄로 '착각'했다. 어제 처음 만난 남자는 또 보자며 명함을 남기고 떠났다. 이제 식장만 알아보면 되겠다. 지지의 여자 친구들은 호들갑을 떠느라 분주하다. 전화를 기다리느라 전화기 옆에서 근무를 서고 음성사서함 비밀번호를 누르는 손은 기계처럼 능숙해졌다. 그러나 끝내 전화는 오지 않는다. 내 번호를 잃어버린 게 아닐까라는 망상으로 넘어가려는 순간, 알렉스(저스틴 롱 분)의 '돌직구'가 날아온다. 


"내가 뭐랬어? 남자들은 관심 있는 여자가 있으면 들이댄다니까? "
"혹시 내 번호를 잃어버렸을 수도 있..."
"나는 전화번호 책 뒤져서 50명의 로렌한테 전화 돌린 적도 있어"

 당신의 휴대폰이 시계가 된 이유, 전화라곤 "밥은 잘 먹냐"는 엄마뿐인 이유는 간단하다. 당신이 그의 이상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는 듬직한 남자를 좋아하는데 나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며, 당신은 진정한 사랑을 찾지만 그는 부나방 같은 하룻밤을 꿈꾸기 때문이다. 슬프지만, 그게 전부다.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 1510-1511 
프레스코 밑변 820cm ㅣ 바티칸 미술관 <서명실> 벽화


 라파엘로는 자신의 역작 <아테네 학당 (school of athens)>에 고대 그리스를 풍미했던 학자들을 그려 넣었다. 화면 중앙,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 남자의 이름은 플라톤이다. 플라톤은 '이데아(idea) 론'이라는 유명한 학설을 펼친 철학자다. 지상의 모든 사물은 이데아의 복제품일 뿐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플라톤은 지각 있는 자라면 응당 이 사실을 깨닫고 이상향(이데아)에 가까워지려 노력해야 한다고 강변했다. 그의 손가락이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 이유다. 


 이상형은 가장 이상적인 대상의 조건들이다. 청순하고 듬직하고 지적이고... 이상형의 조건에 완벽히 부합하는 사람(이데아)과의 연애야말로 꿈이고 이상이다. 그러나 지상에 발 묶인 우리는 그런 사람은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없다면 비슷하기라도 해야 한다. 비슷하지조차 않은 사랑은 사랑이 될 수 없다. 이것이 플라톤과 알렉스의 사랑법이다.


 반면 플라톤과 알렉스식 사랑에 반기를 든 이가 있었다. 플라톤의 오른쪽에서 땅을 가리키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다. 그는 플라톤의 가장 유명한 제자임과 동시에 플라톤과 사상적으로 가장 많은 갈등을 빚은 철학자였다. 실재하는지 아닌지도 모를 이상향(이데아)을 설정해 놓고 지상의 삶을 폄하하는 스승에게 그는 동의하지 않았다. 지상에 묶인 우리는 지상에서 마주치는 것들을 탐구하고 사랑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지지가 삶을 사랑하는 방식이다.


                                                  출처 = 영화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캡처


"좋겠어. 감정조절의 대가셔서. 얼마나 편하니? 상처받을 일도 없고. 너는 내가 우스워 보이지? 하지만 이건 내 감정이 살아있다는 증거야. 네가 못할 사랑, 반드시 내가 먼저 할 거야."


 상냥하게 연애 상담에 응했을 뿐인 알렉스에게 지지는 사랑을 고백한다. 여자들 착각은 못 말린다며 혀를 차는 알렉스에게 지지가 날리는 일침은 남루할지언정 당당하다. 상처 입을 가능성을 과소평가하고 뭔가를 얻을 가능성을 확대 해석하는 것이 청춘의 일면이라면, 지지는 아직 청춘이다. 비루하고 아파도 기어이 찾고 말겠다는 무모한 의지. 사랑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어린애로만 지지를 보던 알렉스의 눈빛은 이채를 띠기 시작한다.


 영화의 끝에서 알렉스는 지지의 방문 앞에 선다. 이상형과 유사하기는커녕 다른 종족에 가까운 지지에게 왜 끌리는지 자신조차 설명할 수 없다. 방문이 열리고 왜 왔냐는 질문에 알렉스는 품속에서 볼펜 한 자루를 꺼낸다. 치과 판촉용으로 제작된 이 싸구려 볼펜은 영화 초반에는 지지의 것이었다. 



출처 = 영화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캡처
"글쎄. 나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뭔가 (널 만날) 핑계가 하나 필요했거든"
"난 네 스타일 아니라면서."
"맞아 근데... 넌 예외야"


 영화 중반에서 알렉스의 표현대로 "가슴이 큰" 것도 아닌 지지를 어째서 사랑하게 됐는지 본인도 알 수 없다. 알렉스가 이상형의 완전무결함을 지키기 위해선 지지에게 향하려는 마음을 내쳐야만 한다. 예외가 인정되는 순간 진리는 진리가 아니니까. 고뇌하던 알렉스는 이데아를 가리키던 손을 거둬 지지의 방문을 두드렸다. 사랑은 천상의 것이 아닌 지상에서 벌어지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를 누구에게나 추천할 수 있는 영화냐고 묻는다면 선뜻 대답하기 망설여진다.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시대착오적인 설정들이 눈에 밟히기 때문이다. 영화 속 여성들은 하나같이 사랑(연애)이 아니고는 그 무엇 가치를 두지 않는 것처럼 그려진다. 또한 알렉스와 지지 커플을 제외한 다른 커플들의 경우, 여성들은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남성의 사랑을 못 박는데 혈안이 된 것처럼 행동한다. 일과 사랑을 동시에 잘해나가던 남성들은 마지못해 결혼하거나 결혼을 회피한다. 비혼 선언이 이어지는 현재 대한민국에서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는 확실히 시대에 뒤떨어진 면면을 보인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나는 이 영화가 볼만한 영화라는 의견에 동의한다. 이상형이라는 환상의 공허함을 유쾌하게 비유해 내는데 성공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몇몇 '꼰대'적인 설정들에 대해서는 이 영화가 무려 8년 전에 개봉했다는 사실에 근거해 면죄부를 주기로 한다. 한때 문학계의 북극성으로 통하던 김훈의 작품들이 오늘날 페미니즘 관점에서 재평가되고 있는 것처럼, 시간의 강풍은 예술마저 풍화시키는 법이다. 


 훗날 그녀(혹은 그)의 방문을 두드리게 될 이 땅의 모든 알렉스들은 황당해하는 지지에게 이런 말을 속삭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너 같은 사람들은 내 스타일 아니야. 물론 너는 예외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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