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이라는 저주와 인간의 주체성
“새장이 새를 잡으러 나섰다”
- 프란츠 카프카 잠언집 중
평생 동안 새장을 피해온 남자가 있었다. 남자의 이름은 오이디푸스(Oidipous). 왕가의 적손이었다. 남자의 부모는 델포이 신관으로부터 “아이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다”라는 신탁을 받았다. 신탁을 무시하자니 불경죄가 두려웠고 믿자니 엄습해 올 숙명이 가혹했다. 왕은 태어난 지 사흘이 된 아들을 들판에 유기할 것을 명령했다. 아이는 발목이 쇠꼬챙이로 꿰인 채 들에 버려졌다. 남자의 이름이 고대 그리스어로 ‘퉁퉁 부은 발(오이디푸스)’이 된 이유다.
목동에 의해 구출된 오이디푸스는 이웃 나라 코린토스의 왕에게 바쳐져 왕자로 양육된다. 장성한 오이디푸스는 “너는 어머니와 몸을 섞고 아버지를 죽일 것이다”는 신탁을 듣는다. 아버지이자 코린토스의 왕인 남자를 오이디푸스는 사랑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피해 코린토스를 떠난다. 방랑 끝에 오이디푸스가 당도한 땅의 이름은 테바이. 훗날 자신이 죽이고, 몸을 섞을 친부모가 다스리는 나라였다.
먼 시간을 돌아, 남자는 새장 안으로 돌아왔다.
『오이디푸스』는 본디 시인에게서 시인으로 구전되던 서사시를 소포클레스가 비극으로 각색한 작품이다. 소포클레스는 이 작품으로 말미암아 불멸의 천재로 인류사에 각인된다. 원작인 오이디푸스 서사시는 명맥이 끊어져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소포클레스의 천재성은 오이디푸스 서사시의 전개 방식을 혁명적으로 재배치했다는 데 있다. 이야기의 시작부터 오이디푸스는 이미 테바이의 왕이자 이오카스테 왕비의 남편이다. 그는 테바이인들을 괴롭혀 온 괴물 스핑크스를 꾀로서 물리친 공로를 인정받은 바 있다. 선왕인 라이오스는 이름 모를 도적에게 살해당했고, 오이디푸스는 라오이스의 왕비와 함께 테바이의 왕위를 물려받았다.
“[오이디푸스] 그리고 내 간절히 비노니, 그 알려지지 않은 살인자는 혼자서 범행을 했건 여러 사람과 작당을 했건 그 자신이 사악한 인간이듯 불행한 일생을 사악하게 보낼지어다!”
-『오이디푸스 왕』 246행
도시를 휩쓴 역병으로 고통받는 테바이 시민들에게 ‘라이오스의 살해자를 찾아 처벌하라’는 신탁이 내려진다. 왕은 시민들의 지배자이자 수호자였으므로 신탁은 곧 오이디푸스 왕의 의무이기도 했다.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를 살해했다고 알려진 이름 모를 도적을 수차례 저주하며 철저한 수사를 명한다.
왕명에 따라 라이오스 살해 사건의 관련자들이 증언을 시작한다. 오래된 퍼즐 조각들이 해묵은 먼지를 터는 와중에 오이디푸스는 이유 모를 불안에 시달린다. 라이오스 왕은 세 갈래 길이 난 좁은 협곡에서 한 명의 도적에게 살해당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의 불안은 절정에 달한다. 수십 년 전, 오이디푸스는 마차로 길을 막고 무례하게 자신을 폭행한 노인과 그의 수행원들을 때려죽인 일을 기억해 낸다. 그곳은 세 갈래로 나눠지는 좁은 협곡이었고,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다는 그의 운명을 피해 달아나던 길이었다. 운명을 피해 달아난 길목 위에서 남자는 잔인한 운명과 마주했다.
“[오이디푸스] 이제 너희들(자신의 두 눈)은 내가 겪고 내가 저지른 끔찍한 일들을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 너희들은 보아서는 안 될 사람들을 충분히 오랫동안 보았으면서도 내가 알고자 했던 사람들을 알아보지 못했으니 앞으로는 어둠 속에 있을지어다!”
-『오이디푸스 왕』 1270행
어머니이자 아내인 이오카스테는 목을 매달아 자살했고 오이디푸스는 그녀의 황금 브로치로 두 눈을 찔러 자신의 패륜을 단죄한다. ‘피의 검은 소나기가 우박처럼 쏟아져 내렸다’고 소포클레스는 서술했다. 핏빛으로 시야가 저무는 와중에 그는 되뇌었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은 새장을 피해왔던 게 아니라 운명이라는 커다란 새장 속에서 태어나 아등바등 몸부림친 건지도 모른다고.
오이디푸스가 마주한 비극의 근본적인 책임은 신들에게 있다. ‘아버지를 해치고 어머니와 동침할’ 운명을 점지한 건 운명의 여신들이었다. 잔혹한 패륜을 피하고자 그는 방랑에 나섰고, 결과적으로 운명의 아가리 속으로 직진해 들어갔다. 숙명 앞에선 인간이 그러하듯, 그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그렇다면 오이디푸스는 운명의 신이 악의적으로 서술한 비극 대본에 놀아난 꼭두각시에 불과했을까.
“[오이디푸스] 그자(라이오스의 살해자)를 내 집안의 화롯가에 받아들인다면 내게도 방금 그들에게 내린 것과 같은 저주가 이루어 지기를!”
- 『오이디푸스 왕』 250행
오이디푸스의 죄는 그의 오만(hybris)에 있다. 자신에게 무례했다는 이유로 그는 힘없는 노인과 그의 수행원들을 살해했고 그 사실을 까맣게 잊었다. 스핑크스 처치라는 공적과 테바이 왕위 계승의 영광이 그의 눈을 가린 까닭이다. 이름 모를 노인을 죽인 그날을 가슴속 무거운 짐으로 간직하고 있었더라면, 그는 라이오스의 살해 용의자에게 감당 못할 저주를 쏟아 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진실의 그날, 오이디푸스가 내뱉은 저주는 오롯이 자신을 향했다. 함부로 남을 저주하면서 자기 눈의 들보를 외면한 오만이 오이디푸스를 무너뜨린 죄목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오이디푸스의 주체성 역시 이 대목에서 동시에 드러난다. 오이디푸스는 잔인한 신들의 운명에 놀아난 꼭두각시였다. 패륜적인 예언을 막기 위해 모든 걸 버리고 방황할 것을 택했다. 그는 라이오스를 살해하고 그의 친모를 아내로 삼지만 이에 대해 완전히 무지했다. 이 무지함이 패륜에 대한 변명이 된다는 걸 오이디푸스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변명 없이 죗값을 스스로 치름으로써 책임의 의무를 다했다. 그는 무지했기에 오만했으나, 오만을 무지로서 변명하지 않았다. 오이디푸스의 죄와 인간적 주체성이 동시에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나부터 잘하자 ‘는 마음먹기에 비해 타인을 깎아내리기는 일은 늘 쉽고 짜릿하다. 나 아닌 누군가를 단죄하지 않기 위해 애쓰지만 쉽지 않다. 저런 놈은 왜 살까. 살 가치가 없는 인간 아닐까. 내 안에서 말이 들끓을 때마다 나는 함부로 저주하는 오이디푸스의 오만함과, 그의 멀어버린 두 눈을 그려본다. 언젠가 내가 내뱉은 저주가 나를 향했을 때, 나는 겸허히 내 두 눈을 찌를 만큼의 양심은 간직한 인간이기를 바란다.
운명 극복과 심판, 행복과 좋음, 옳은 삶과 그른 삶...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단어와 구호들에 매몰된 현대인들에게 소포클레스는 오직 겸손만을 주문하며 일갈한다.
"우리의 눈이 그 마지막 날을 보고자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는, 죽어야 할 인간일랑 어느 누구도 행복하다고 기리지 말라. 삶의 종말을 지나 고통에서 해방될 때까지는."
- 『오이디푸스 왕』 1529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