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언 Oct 12. 2017

최은영 단편 <그 여름> : 흔해 빠지지 못한 사랑

2017년 제 8회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 중


 중학교 축구부원들이 공을 찬다. 타는 듯 내리쬐는 태양 아래서도 사뭇 진지하다. 수이가 힘껏 찬 공에 이경은 얼굴을 맞고 쓰러졌다. 안경이 부러졌고 코에서는 피가 흘렀다. 수이는 이경을 부축해 안경점과 병원을 돌았다. 그녀의 코가 다 나은 후에도 수이는 매일 이경을 찾아왔다. 손에는 늘 딸기맛 우유를 든 채로. 간혹 수이가 오지 않는 날이면 이경은 웬지 서글퍼졌다. 사랑이었다.


 수이가 남자...이경이 여자... 이름 한번 성평등하게 지었다고 투덜거리며 나는 수이와 이경의 성별을 외웠다. 상상하지 않고 소설을 읽어낼 방법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햇빛에 그을린 단단한 뒷목과 '이수이'라는 이름이 박힌 유니폼을 상상했다. 딸기 우유를 들고 올 수이를 기다리며 치맛 자락을 쓸어내리는 이경을 그렸다. 흐르는 땀을 닦으며 멋쩍게 웃는 소년과 애꿎은 땅만 발끝으로 긁는 소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둘의 사랑은 평범했다. 풋내기들답게 더듬거리며 서로를 알아갔고 텅 빈 허공을 가득 채우는 충만감을 만끽했다. 평범해서 어여쁜 사랑이었다. 소설 중반, 이경과 수이가 레즈비언이라는 문장을 읽기 전까지는 그랬다.


  두 사람의 흔해빠진 사랑 이야기는 일순간 성소수자의 엄혹한 투쟁기로 변모했다. 아니, 정확히는 평범한 사랑 이야기를 평범하지 않게 읽는 내가 있었다. 최은영은 두 사람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문장을 제외하고는 '성소수자로서의 사랑'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두 사람은 '평범한' 사람들처럼 울고 웃고 사랑했다. 21세기 한국, 성소수자가 통과하는 사랑의 지난함에 대하여 최은영은 말을 아꼈다. 두 사람이 그리는 사랑의 포물선은 이성애자들의 그것과 같다. 매료되고 실망하고 다시 뒤엉키고/. 그 해 여름. 두 사람을 뒤엉키게 한 사랑이 숨을 거두면서 두 사람은 헤어졌다. 십삼년 후, 이경은 종종 수이를 생각한다. 이토록 평범한 사랑 얘기를 읽고 그 평범성에 놀라는 내가 나는 새삼스러웠다.


"인간은 누구나 아주 모르지 않으면서 겨우 조금 아는 것에 사로잡혀 살아간다는 것을 새삼 떠올렸을 뿐입니다."

                                                                                  - 천희란, 「다섯 개의 프렐류드, 그리고 푸가」 281p


 『근사록』에서 주희는 "책을 읽기 전과 후과 똑같다면 책을 읽을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했다. 프란츠 카프카 역시 "책은 얼어붙은 내면의 바다를 깨는 도끼(axt)"여야 한다고 일갈했다. 주희와 카프카는 동어, 동감 반복으로서의 독서를 경계했다. 책장을 덮은 후 가슴속 어딘가가 조금이나마 불편해졌다면, 그 작품은 내게 성공한 작품이 되는 셈이다.


 동성애자들의 사랑이 특별한 시선을 받는다는 건 누구나 안다. 인권은 아직 충분히 확장되지 못했으므로 그들의 사랑은 지난하고 엄혹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영위하는 사랑의 형태까지 특별하고 특이하다고 함부로 가정해도 되는걸까. 축구부인 수이를 남자로, 구경하다가 공에 맞은 이경을 여자로 상정한 나를, 나는 한동안 불편해 하기로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소설『82년생 김지영』: 지영씨들을 위한 변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